뉴욕시에서 파라하 맘다니 시장이 탄생했습니다.
34세, 이민 2세, 사회주의자 출신이라는 그의 이력은 미국 언론의 시선을 단번에 끌었지만, 저는 이번 결과를 조금 다르게 보고 싶습니다. 단순히 '정치적 이변’이 아니라, 생활비에 짓눌린 대도시 시민들이 제도적 변화를 요구한 신호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재정과 정책 관점에서 보면 그 신호는 뉴욕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과 부산, 광주 같은 한국의 대도시에도 그대로 닿아 있습니다.
생활정치의 부상: 추상적 비전보다 ‘월세·교통비·보육비’
맘다니 시장의 공약을 보면 흥미롭습니다. 이념이나 거대한 비전이 아니라, 월세·교통비·식비·보육비라는 네 가지 비용에 집중합니다.
뉴욕 시민의 60% 이상이 “월세 부담으로 이사를 고려한다”는 조사 결과, 전국 평균 대비 1.5배 높은 교통비, 미국 최고 수준의 보육비 등 현실적 부담이 공약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중요한 변화를 봅니다.
더 이상 “삶의 질을 높이겠다”는 추상적 정책 구호가 아니라, 시민의 지갑 속 숫자를 어떻게 바꾸는지가, 그 실질적 효과가 정치적 동력을 만드는 시대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한국 대도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제 공약의 경쟁은 “월세 20만 원 줄이기”처럼 구체적인 숫자 싸움으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뉴욕의 재정 현실: 확장하려는 정책, 좁아지는 재정
문제는 뉴욕의 재정 상태가 그리 여유롭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뉴욕시는 약 1,000억 달러에 가까운 장기채무를 떠안고 있고, 매년 70억 달러 넘는 돈을 이자와 원금을 갚는 데 쓰고 있습니다. 뉴욕주 감사원은 앞으로 2026년부터 2029년 사이에 매년 5~7% 규모의 구조적 재정적자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합니다.
그런데도 맘다니 시장은 향후 10년간 1,000억 달러 규모의 공공·사회주택 공급과 공공주택 보수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이 가운데 700억 달러는 새로 발행하는 시 채권으로 조달하겠다는 구상입니다. 금융시장과 신용평가사들이 신용등급 하락 가능성을 곧바로 거론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에 비유하면, 지방채 부담이 큰 광역시가 “앞으로 지하철 노선을 5개 더 만들겠다”고 선언한 상황과 비슷합니다.
결국 도시정책의 확장성은 재정 지속가능성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지속가능성을 확보하지 못한 복지는 오래가지 못하고, 오히려 반동을 부르기도 합니다. 1970년대 뉴욕시 파산 위기가 보여준 교훈이기도 합니다.
제도적 제약: 시장의 의지로만 되는 일은 없다.
뉴욕 시장의 권한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법인세·소득세 인상은 주 의회 승인 사항이고, 임대료 동결은 '렌트가이드라인위원회(RGB)'라는 독립기구가 결정합니다. 연방정부의 지원 변동도 상수입니다.
즉, 맘다니 시장의 공약은 시장 개인의 의지와 별개로 시–주–연방의 다중 권한 구조를 넘어야 합니다.
한국 지방정부가 공공주택, 마을버스 무임제, 보육정책 등을 추진할 때 중앙정부·국회·지방의회에 갇히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위험 시나리오: “세수 이탈 → 부채 증가 → 신용등급 하락”
재정 분석가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우려는 세 가지입니다. 들어오는 돈은 줄고, 나가는 돈은 늘고, 결국 재정 신용도는 떨어지는 순환. 문제는 이 세 가지가 서로를 밀어 올리는 구조적 연쇄를 형성한다는 점입니다.
팬데믹 이후 고소득층이 플로리다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뉴욕의 세수 기반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뉴욕은 미국에서도 ‘부유층 의존형’ 도시인데, 이들의 이동은 곧바로 재정 악화로 이어집니다.
여기에 부채 부담이 크게 늘 가능성도 있습니다. 부채가 지금보다 50~70% 더 커질 경우, 뉴욕은 1970년대처럼 외부의 긴축 통제에 다시 들어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옵니다.
하지만 더 큰 위험은 ‘정치적 역풍’입니다. 진보 정책이 재정 실패와 연결되는 순간, “복지 = 재정 위기”라는 프레임이 강화되며 이 프레임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구조적 개혁이 후퇴할 수 있습니다.
정책은 결국 ‘지속가능한 설계’ 위에서만 굴러간다
늘 강조하지만, 정책은 의지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구조 설계가 핵심입니다. 결국은 설계의 문제, 더 정확히는 지속가능성과 디테일의 문제입니다.
맘다니 시장의 생활 정치 실험도 이 지점에서 성패가 가려질 것입니다.
우선, 몸집이 작은 정책부터 시작하는 방식이 필요합니다. 버스 무임제나 공영마트 같은 정책은 비용 부담은 적지만, 시민들의 체감효과가 큰 정책을 먼저 시행하고, 사회주택 같은 큰 프로젝트는 긴 호흡의 로드맵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재정 가이드 라인과 로드맵을 제시해야 합니다. 부채 상한과 부채서비스 비율 같은 기본 원칙이 설정되지 않으면 시장도 시민도 정책의 지속성을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정책은 숫자로 설득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미 여러 나라와 도시에서 입증되고 있는 방식이 있습니다. 바로 민관이 역할을 나누는 사회주택 모델입니다. 공공이 토지·기획·임대료 규제를 맡고, 민간이 금융과 건설을 담당하는 방식은 공공재정 부담을 줄이면서도 공급을 유지할 수 있는 현실적인 구조입니다. 한국에서도 공공주택과 도시재생 분야에서 점점 더 중요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적 시사점: ‘생활비 정치’와 ‘재정 설계’의 결합
맘다니 시장의 당선은 한국 정치에도 몇 가지 분명한 신호를 보냅니다.
첫째, 생활비는 이제 정치의 핵심 의제입니다. 이념이나 정당이 아니라, “얼마나 내 삶이 달라지는가”가 유권자의 판단 기준이 됐습니다.
둘째, 재정 설계 능력이 정치 리더십의 중요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장기 재정 전망과 부채관리, 민관 혼합모델은 한국에서도 이미 필수 역량입니다.
셋째, 지방정부가 실험하려면 재정 자율성이 필요합니다. 제도가 받쳐주지 않으면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변화를 만들기 어렵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넷째, 만약 ‘서울판 맘다니’가 등장한다면, 정치적 이미지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숫자입니다. 어느 정도 투자할 것인지, 재원은 어디서 마련하는지, 10년 뒤 재정구조는 어떻게 변하는지. 정책은 결국 숫자로 된 약속입니다.
맘다니 시장의 실험은 “생활 정치는 가능하다”라는 희망과 “재정의 현실은 냉정하다”라는 경고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한국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모두가 이 실험을 단순한 해외 사례가 아닌, 생활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구조적 재정 개혁의 논의로 이어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책의 성패는 언제나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재정 설계에서 갈리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