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서해안 4대항구 중 하나 경찰서 은행등 15개 주요기관 설치 30년대 토사 쌓여 항만 기능 상실

일제 시대 서해안 4대 항구의 하나로 면모를 과시했던 줄포면은 당시 부안 지역의 경제 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했다. 줄포는 그 이전에도 군산항 다음의 큰 서해 항구로 고창과 정읍을 아우르는 상권과 생활권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편리한 육상과 해상의 교통로는 이곳을 각종 산물의 집결지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일제는 줄포를 호남 지방의 농산물 수탈 거점으로 삼으려 했고 이를 위해 면사무소, 경찰서, 도정공장, 통운창고, 식산은행, 농산물 검사소, 어업조합 등 15개의 주요 기관을 설치했다.

목조 기와지붕의 면사무소는 현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일제 말기인 1943년께에는 직원이 3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919년도에 설립된 줄포경찰서는 부안경찰서의 전신으로 부안 지역최초로 설립됐으며 식산은행 줄포 출장소 또한 정읍을 빼면 인근 지역 가운데 유일하게 이곳 줄포에 자리 잡고 있었다.

2003년에 발간된 지역 향토지 <내 고향 줄포>는 20~30년대 일제 치하 주요 관공서에 대한 흥미로운 기억들이 채록돼 있다. 이 책자는 경찰서에 대해 ““고노야로오(이새끼)!” 하고 ‘의좃매’(숫소의 생식기를 말려 나무 끝에 매단 것)로 후려치며 구둣발을 구르면 청내는 쩌렁쩌렁 울려 퍼져 그 앞을 지나는 행인조차 목을 움츠렸다”고 기록하고 있어 경찰의 위압적인 권력을 보여줬다. 서빈동에 위치했던 식산은행 출장소는 주요 고객이 삼양사 정미소였다고 한다. 소장은 일본인이었고 직원들은 조선인들이었는데 “줄포 멋쟁이는 첫째가 은행원, 그 다음이 자동차 운전수였는데 그들은 기생이 줄줄이 따랐다”고도 전해진다.

일제 관할 관공서의 설립과 함께 지역 경제권 또한 일본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위도 인근 칠산어장을 가까이 둬 호황을 누리던 조선의 객주들은 소멸하고 말았다. 대신 일본인들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1927년께에는 일본인 몇몇의 합작으로 현재 서빈동 일대에 매립공사가 진행됐고 매립부지 위에 줄포만 어업조합이 들어섰다. 1930년대를 전후해 이곳에는 일본인 소유 업체가 30여개에 달했다. 그들은 미곡상, 잡화상, 목욕탕 외에 대규모의 고급 요정도 손을 대 일본식 유흥 문화를 들여오기도 했다.

‘식민지’ 줄포의 위기는 1930년대부터 시작됐다. 줄포만 연안에 토사가 쌓이기 시작하며 줄포항이 빠르게 항만 기능을 상실해 갔기 때문이다. 결국 그 여파로 줄포에 소재했던 경찰서와 식산은행은 부안읍내로 이전했다. 항만 기능은 1937년 일본 개인자본으로 설립된 곰소항이 대신했다.

하지만 20여년 동안 일제가 별다른 장애물 없이 이곳을 수탈 전진기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3·1 운동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1919년 3월30일 장날을 맞은 부안의 만세 시위에 이어 줄포에서도 일제에 항거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4월18일 줄포보통학교 학생들은 만세 시위를 벌였고 이날 밤 인근 마을에서도 횃불 행진이 이어졌다.

서복원기자 bwsuh@ibuan.com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