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학병 강요 논설 게재...김연수 일제전쟁기금에 헌금

현하 우리가 당면한 의무라고 하면 제군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여명을 맞이하여 인류 역사에 위대한 사명을 건설하려는 대동아 성전에 대한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인 것이다. 김성수의 논설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중 일부.

동아일보 창업주인 김성수가 일제 말기 ‘매일신보’에 기고했던 글이다. 그는 동아일보를 설립한 것 외에도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창립하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이승만 정권 아래 부통령에 당선된 바 있는 현실적으로도 ‘막강한’ 권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성수는 독립유공자로 포장되어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바 있으나 일제 말기에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일제에 협력한 사실이 광복 50주년인 1995년 처음으로 제기됐고, 지난해는 일부 국회의원들이 나서서 서훈을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김성수의 일제 말기 친일활동을 보면 먼저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일제는 조선을 전시체제로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각 분야의 유력 인사들을 강제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김성수 역시 중일전쟁 직후부터 이른바 ‘시국 강연’의 연사로 참여하면서 일제의 전시 동원 정책에 협력하게 된다. 1937년 9월 서울시의 라디오 강연에 나서서 일제의 전시 동원에 협조했으며 또한 춘천까지 ‘강연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일제는 1943년부터 징병제와 학병제를 실시했는데, 김성수는 당시 보성전문학교 교장 자격으로 1943년 8월5일 징병제를 찬양하는 장문의 논설을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문약(文弱)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尙武)의 정신을 찬양하라”는 논설을 기고했다.

또한 1943년 11월6일에는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라는 조선 내 지식인들의 학병 권유 연재 논설 가운데 세 번째로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논설을 게재하기도 했다.

친일자본가로 알려진 김연수는 친형인 김성수의 투자를 바탕으로 1922년에 경성방직의 상무겸 지배인으로 취임하는데, 이것이 그가 기업활동을 하는 시발점이 된다. 일제의 정책금융회사인 조선식산은행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구축한 경성방직의 신화는 이후 동아일보와 고려대학, 다른 한편으로는 삼양사라는 ‘신화’로 이어진다. 그는 또 만주국 명예총영사, 중추원잠의,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장 등을 지내면서 친일 활동에 앞장섰다.

그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제 전쟁기금으로 1937년부터 43년까지 국방헌금 2만원(1937년), 육해군기금 10만원(1938년) 등 7년간 80만원의 헌금을 냈고, 학병권유 연설을 하는 등 친일 반민족행위에 적극 나섰다. 이외에도 친일매체에 활발하게 기고하면서 ‘정신적’ 친일에도 앞장섰다. 그는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장을 지내면서 ‘매일신보’에 기고한 ‘일억일심’이라는 글에서 조선 사람들에게 전시체제에 협력할 것을 주장했고 총독부의 일본어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학병에 입대하여 죽을 때에야 조선이 ‘제국’의 일원이 될 수 있고, 조선인이 ‘황국신민’이 될 때에야 ‘신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성수 (1891~1955)1919 경성방직 주식회사 창립1920 <동아일보> 설립1932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교장 취임1938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1941 임전보국단 감사1945 한국민주당 창당 1946 대한독립촉성회 부회장1949 민주국민당 창당1951 부통령 당선

김연수(1896~1979)1939 만주국 명예총영사1940 중추원 참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
참고자료 : 「청산하지 못한 역사」민족문제연구소 발간.

이향미 기자 isonghm@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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