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악화에도 58년째 천일염 전통 유지

전국적인 젓갈 명소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진서면 곰소. 하지만 제대로 숙성된 젓갈을 위해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소금. 그 소금을 생산하기 위한 인간들의 노동과 땀이 배어 있는 곳이 여기 곰소 염전이다.

염부 윤판철씨가 결정지에서 소금을 걷어올리고 있다. ⓒ 염기동 기자
결정된 소금을 운반한 윤씨가 창고를 나서고 있다. ⓒ 염기동 기자

해방 직후인 1947년은 곰소 염전을 경영하고 있는 (주)남선염업(대표 신동만)이 창립된 해다. 이 회사 유기성 생산부장은 “벌써 올해까지 연례 주주총회만 58회째 개최됐다”고 덧붙인다. 웬만한 국내 유수 대기업 보다도 평균 수명이 더 긴 이 소금 회사의 목숨은 아무래도 인류사 소금의 역사를 닮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금땀 나도록 질긴 그 목숨에도 언젠가부터 위기의 소문이 따라 붙기 시작했다. 그때가 대략 80년대말과 90년대초다. 한쪽에서는 소금 수입 자유화 물결로 국가 보상금과 폐전을 맞바꾸라는 유혹이 또 한쪽에서는 염부들이 인근 공장으로 빠져 나가는 틈새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도 이곳 염전 안팍에 위기의 존재는 뚜렷하다. 다만 세월에 따라 그 색깔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 와중에 2년전 본래 사용하던 ‘백곰표 소금’이라는 상표 마저 도둑질 당하고 말아 지금은 ‘곰소 소금’이 대신한다.

곰소 염전에서 생산하는 소금은 연간 평균 30㎏들이 7만 가마 분량이다. 인근 고창의 해리 염전이나 전남 신안의 대형 염전들에 비하면 생산량은 많은 축에 끼지 못한다. 하지만 곰소는 “양보다 질로 승부한다.” 유 부장은 “뽀오메(간수의 염분 비중 단위. 그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스 사람 이름이다)가 비결이다. 이 비중이 30~40도까지 높아지면 염화마그네슘 성분이 많아져 쓴 맛이 난다. 우리는 25도에 맞추기 위해 간수 교체를 수시로 한다”고 한다. 그 덕택에 소금은 일정하게 담백한 짠맛을 내며 다른 염전 소금에 비해 20~30% 높은 가격 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유 부장은 또 다른 특성에 대해 “염전이 바다에 직접 접해 있지 않고 변산반도 만(灣)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인체에 유익한 미네랄 성분이 소금에 흡수되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곰소 소금의 품질도 염전에서 ‘짜고 질긴 노동’ 없이는 불가능하다. 여기에 염부들의 삶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소금 위해 하늘과 24시간 전쟁 벌이는 염부들

35년째 이곳에서 소금을 만들어온 윤판철씨(57세)는 염전 노동에 대해 “하늘과의 싸움”이라고 잘라 말한다. 소금 생산 과정이 일조량, 풍량, 습도에 좌우되기 때문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11월부터 2월까지가 휴전(休田) 기간에 해당한다. 휴전을 한 달 가량 앞둔 지난 4일 저녁 ‘소금 걷이’를 위해 찾은 염전은 조금은 ‘썰렁’해보였다.

최초 저수지, 제1, 2 증류지를 거쳐 소금이 생성되는 ‘결정지’에서는 성수기인 5~6월에 비해 절반 가량의 소금만을 걷어 낼 수 있었다. 이날 저녁의 소금 걷이 만을 놓고 본다면 염전 일은 ‘순간 노동’이자 ‘가족 노동’이다. 소금 결정을 위해 사흘 가량을 기다린 것에 비해 걷이는 한 시간만에 후딱 해치워졌고 걷이를 위해 집중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양을 채우기 위해서는 가족까지 동원돼야 했다. 하지만 가족의 여분 노동이 댓가로 지불되고 있는지는 미지수다. 또한 일차 결정된 소금의 배수를 위해 사다리꼴로 만들어진 창고에 소금이 가득 쌓이기는 쉽지 않다.

24시간 하늘을 쳐다 보며 배수로 정비하고 간수 교체하며 며칠 기다렸다가 소금 걷어내고.... 끈질기고 힘겨운 노동으로 유지되는 염부들의 일상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곰소의 변치 않는 소금 맛과 그리고 그것을 위한 염부들의 일상과는 달리 그들의 삶엔 굵직 굵직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수십년간 노동의 댓가를 지불받는 방식이 변해왔다.

본보 서복원 기자가 대패질을 하고 있다. ⓒ 염기동 기자

염부들에게는 최고의 호시절이었다는 임금제와 최악인 임대제를 거쳐 지금의 생산량 반분제(사측과 총생산량 5:5 배분)에 이르기까지 변화의 길목 마다 염부들 또한 거친 삶의 굴곡을 겪어 왔으리라. 염전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빈 목재 가옥들의 행렬은 강원도 어느 산골의 폐광촌을 떠올리게도 한다. 예전과 달리 지금 염부 가족들은 더 이상 염전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두 세 가구만이 과거의 흔적을 남기며 살림살이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 과거의 모든 변화와 풍상 보다도 더한 최악의 소문이 염전을 떠돌아 다니고 있다. 소문의 실체는 ‘골프장’이다. 그것은 곧바로 폐전(廢田)을 뜻한다. 평생 골프장 근처에라도 가본 적이 없을 것 같은 늙은 염부들은 속터지고 답답하기만 하다. 염부로서의 삶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지 매각 가능성에 대해 신동만 사장은 “솔직히 검토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유지하기로 했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 ‘당분간’도 얼마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신 사장의 답변에서도 염부들의 얼굴에서도 불안감이 묻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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