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용기의 다른 얼굴

ⓒ 홍성담

결국 해낸 일들이기는 하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크든 작든 그 일들의 시작에는 어쩔 수 없이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1989년 당시 평양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남한 학생 임수경을 데리러 방북할 때도 그랬다. 내가 꼭 가야 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힘들었던가. 나는 갈 수 없다고, 가고 싶지 않다고 속으로 수없이 버둥거렸다. 깊은 번뇌 끝에 마침내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기기로 하고 방북을 준비하면서도 나는 적잖이 두려웠다. 대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하고.

2003년 무려 65일 동안 진행된‘온 세상의 생명평화와 새만금갯벌을 살리기 위한 삼보일배’그 출발 때도 그랬다. 정말 두려웠다. 시작은 보이는데 끝이 안 보이는 그 길이 너무도 막막했다. 걸음걸음 가는 것도 아니고 세 걸음에 한 번 절이라니 서울까지는 그저 아득하기만 했다.

한평생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일, 핵쓰레기를 낳지 않는 평화로운 에너지 사용문제를 두고 지금 부안사람들은 이래저래 고민이 많다. 핵폐기장 반대 싸움의 의미가 진정으로 확인되려면 태양에너지든 바람에너지든 무어든 대안을 모색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 쉽지 않은 짐이 이제 우리 어깨 위에 올려져 있으며 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재원은 어떻게 조달해야 할지, 넘어야 할 큰 산이 몇 개나 나설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부안성당 신자들도 갑론을박 중이다. 방향의 가닥은 잡혔으나 성당 집안 잔치 말고는 큰 바자회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니 앞으로 헤쳐 나갈 일에 심사가 복잡들하다. 그냥 예전처럼 편안하고 조용히 살면 안될까 하는 드러내지 못하는 생각들도 쉬이 읽힌다.

다른 미물도 아니고 인간인 바에야 그저 숨 쉬고 산다고 생명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면이 깊어지든 생활이 변화하든 인간생명은 자고로 성장과 변화의 여정 속에서 생명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껏 살던 방식과 생각대로 사는 게 제일 속 편하고 안전하기는 하다. 거기에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자 하거나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가치관을 변화시켜야 할 때 두려움이 그림자처럼 따르는 것은 도리어 자연스럽다. 이때의 두려움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겸손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두려움의 다른 모습은 파괴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기 자리를 잃을까봐 남을 지배하는 방식을 택하고 실패할까봐 창조적 대안을 피해간다.

체르노빌을 겪고서도 핵에너지가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끝없는 바다 새만금갯벌을 일단 간척부터 하고 용도는 나중에 생각하자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들이대는 이들이나, 밀양 천성산 지나 부산 금정산까지 장장 31km나 되는 장대터널을 뚫어 버스도 아니고 고속철도를 달리게 할 작정이면서도 제대로 된 환경영향평가를 한사코 거부하는 자들의 내면에는 깊은 두려움이 깔려 있다. 탐욕은 두려움을 다루고 이기려는 표현의 하나지만 이렇게 지극히 파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용기, 그것은 두려움과 함께 간다. 새롭고 익숙하지 않은 관계와 영역 속으로 발 들여놓기 위해 우리에겐 용기가 필요하다. 두려움을 다 떨군 다음에 나설 때가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 그냥 한 걸음 들어서는 게 용기이다. 두려움에 웅크리고 그 속으로 숨어버리면 그 두려움은 영원히 두려움으로 남는다.

허나 두려움을 인정하고 함께 가기로 길을 나서면 두려움은 이미 두려움이 아니게 된다. 이것은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다. 아예 마음이 없으면 두려움도 없다. 그 미지의 것에 다다르고 싶은 마음, 한번 해 보고 이뤄 보고 싶은 마음, 새롭게 살아 보고 싶은 마음, 사귀어 보고 싶은 마음... 두려움이 그런 것들의 또 다른 징표라면 두려움이 아니라 그 마음에 무게를 실어볼 일이다. 그리고 한번 나아가 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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