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잠에서 깬 나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시어머님을 본 것이 꿈이었던가. 모로 누워계신 어머니를 팔을 뻗어 아는 체를 하니 어머니가 내 쪽으로 돌아누우셨다. 돌아가셨다 여긴 분이 다시 돌아와 표정 없는 낯빛으로 와 계신 꿈이 나를 신경 쓰이게 했다. 혹여나 어머니께서 뭐가 좋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땀 젖은 내 몸을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왼쪽 갈비뼈 부위를 심하게 다친 나를 걱정해서 오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굳이 뼈가 끊어지지 않았어도 끊어진 것만큼의 통증을 주는 중요한 자리인지라 나를 더 못 잊으셨던 것 같다.

꿈이 아닌 듯 너무도 생생한 꿈이 며칠이 지나서도 집 밖을 나가지 못하고 있는 나를 자꾸만 어머니에게로 이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진다. 시집 와서 꼬박 25년을 함께 살았던가. 세월은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놓아 보내려 해도 몸속 깊이 진액처럼 남아 있는 끈끈함. 미움도 아니고, 설움도 아니어서 이따금 가슴 한 편을 갈댓잎처럼 스쳐 지나가는 그것이 바로 정이라는 것인가 보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렇게 몸마저 아파 누워 있어 보니, 이 아파트가 어머니에게는 얼마나 삭막했을까, 이미 오래 전 지난 일들에 나는 더욱 마음을 두게 된다.

아침에 가게에 나가려고 할 때면 어머니는 곧잘 내 방으로 건너오시곤 했다. “야야, 내 말 좀 들어봐라. 내가 집에 있기 심심해서 텃밭을 조금 얻었는디, 앞집 여편네가 자기가 할려고 샘을 내. 근디, 내가 안 주지.” 한 마디라도 더 말 걸어보고 싶어하는 투정 아닌 투정이랄까, 그러나 바쁜 나에게 어머니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그저 이웃과 부딪히지 않고 편하게 계셨으면 하는 마음이 앞서 “어머니, 그냥 편하게 계셔요.” 잘라 말하곤 했다.

저녁 늦게까지 이 좁은 아파트에 홀로 계시다가 늘상 나와 대화를 하고 싶어하던 어머니는, 어느 날 노환으로 자리에 누우셨다. 가게를 이전하느라 주어진 5개월이라는 황금휴가를 어머니의 간병을 하는 데 모두 쏟아야만 했다. 삼복더위에 밥 떠먹여 드리고, 얼굴이며 손발은 물론 대소변까지 받아내면서 몸을 씻겨드리는 일들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더위만큼이나 내 속도 찌는 듯했다. 하지만 어머니께 조금이라도 더 잘해드려야지 하는 마음으로 삼복을 지나서도 한참을 더 그렇게 이겨낼 수 있었다. 그러다 무심하게도 어머니는 자리에 누우신 지 꼭 다섯 달 만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햇수로 5년이 지났다.

봉사활동을 나가 만나는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난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았던 어머니! 얼마나 말벗이 그리우셨을까? 그 갑갑한 날들을 견디며 돌아가시기 몇 개월 동안 누워 계실 때는 또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우셨을까? 몸이 아파 누워 있는 것보다도 마음이 더 허전했을 어머니가, 내 몸이 아프고 나서야 더 간절해지는 날이다. 남들은 며느리 손에 간호 받고 편히 돌아가셨다고 말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어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속에 사무친다.

꿈속에선지 생시에선지 아픈 나를 찾아오신 말 없는 어머니, 말씀은 없으셨지만 이 며칠간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어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눈 듯하다. 그리고 그 옛날 친정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부모 살아 있을 때 쓴 나물 한 가지라도 더 해드리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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