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항쟁은 초기 여론 작업에서 승리를 이끌 수 있는 기선제압을 했다고 말하는데.
= 지나고 보니까 초반 여론전에서 승리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굉장히 불안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왔음에도 항상 더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금 안심할 수 있었던 때가 주민투표 이후였다. 초기에 가장 여론작업을 집중적으로 한 곳이 읍내 상권이었는데, 시장 여론이 어떠냐에 따라 부안전체 여론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 개인적으로 어떻게 부안항쟁에 참여하게 됐나.
= 한울공동체 구성원이었고, 예전에 농민회 활동을 한 경험이 있었다. 김홍대씨와 구장회씨 등 한울공동체에 인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초창기 여론 형성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대책위를 주도하고 있던 농민회 활동가들과 가교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참여하게 됐다.
△ 각자 하는 일이 달랐는데 어떻게 뭉치게 됐나. 신속하게 역할 분담이 되고 각자 역할 수용이 가능했던 이유는.
= 대책위라는 조직이 느슨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도부에서 뭔가를 시켜서 한다면 오히려 안했을 것이다. 자신이 뭔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자기 입맛에 맞는 일들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리고 일종의 ‘비상 전시체제’라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 초창기에 교육부분에서 특별한 활동은 어떤 것이었나.
= 교육부분에서는 전적으로 ‘수혈’을 받는 입장이었다. 영광대책위 분들과 환경단체 활동가들이 부안을 방문해 지역을 누비면서 주민들 교육을 도맡아했다. 7월 말이후에는 자체 핵관련 지도사 양성과정을 진행해서 이제 지역주민들 누구나 핵의 위험성등에 대해 잘 알게 됐다. 또한 영광견학이 초기 여론을 제압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 영광견학은 어떤 취지로 진행하게 됐나.
= 영광대책위에서 제안해 왔다. 처음에는 영광이 별 의미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보고 오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영광 견학은 ‘부안에 핵폐기장이 들어섰을 때 부안의 미래가 이렇게 된다’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영광에 빚진 게 많다.
△홍보전을 하면서 느낀 점은.
= 면단위로 갈수록 남자들이 자질구레한 선전활동을 기피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줌마 홍보단과 같은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비민주적이고 권위적인 생각들을 버리고 운동에 있어서도 ‘여성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초기 홍보전의 승리 요인을 무엇이라 보나.
=개인적으로 나는 계속 배우기만 했다. 지금까지도 배우고 있다. 앞으로도 배울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무엇을 잘 했다기 보다는 잘못한 부분들이 먼저 떠오른다. 왜 그때 조급하게 생각했을까. 당장 집회에 나가지 않으면 김종규가 무슨 일을 벌일 것만 같았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이런 싸움이 가능하지 않았나 한다. 그리고 우리가 맞딱뜨린 상대가 간단한 상대가 아니라 굉장히 큰 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질지도 모르는 싸움을 했고, 굉장히 큰 싸움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맨날 져야 하는가 하는 자존심도 있었다. 그런 마음들이 사람들을 뭉치게 한 것 같다. 내가 그 자리에 안가면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할는 것에 대한 미안함, 어찌 보면 사랑이라 표현 할 수도 있는 것 같다.

이향미 기자 isonghm@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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