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미(47) 씨는 20대 후반이던 2006년 김갑술 씨와 결혼하면서 한국으로 왔다. 남편의 집인 진서면 작도마을에서 한국살이를 시작한 김윤미 씨의 삶은 평탄함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굴곡 그 자체다. 하지만 그녀는 가족들이 아프고, 어려운 환경이 원인인 그 굴곡 속에서 꿋꿋이 삶과 가족을 지켜왔고, 지금도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묵묵히 삶을 이어가고 있다.

베트남 호치민 출신의 그녀는 고향에선 가족들과 함께 시장에서 과일과 채소를 파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더 나은 삶을 기대하며 “열심히 살아야지”라는 생각 하나로 남편과 결혼하면서 시작된 한국의 삶은 기대와 다르게 녹록지 않았다. 당연히 말이 통하지 않고, 문화의 차이가 있었기에 타국살이는 적응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남편은 시부모님과 함께 살며 농사를 짓고 있었다. 따라서 김윤미 씨는 자연스럽게 시댁살이와 농사짓고, 살림을 도맡는 삶을 살았다.

벼농사부터 고추, 양파, 마늘, 땅콩 등 밭농사 위주의 농사일은 정말 고단했다. 힘든 일이었지만 김씨는 “식구들과 함께하는 일이었기에 그래도 괜찮았다”며 그때를 추억했다.

그렇게 식구들이 힘을 모아 농사를 지으며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려서 친아버지가 집을 떠난 김윤미 씨에게 다정한 시아버지는 “아빠가 없었던 제게 시아버지는 친아빠처럼 좋은 분이었다. 정말 다정했고, 잘 해주셨다”고 추억했다. 그렇게 좋았던 시아버지는 그녀가 시집온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2010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시아버지의 별세 이후 가족들의 상황은 점차 나빠졌다. 농사일을 비롯해 살림살이, 한국 음식만드는 법을 알려주던 다정한 시어머니도 치매가 걸리고 나날이 증상이 심해졌다.

김윤미 씨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10년여를 집에서 돌봐드렸다. 치매 노인 한 분을 집에서 모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경험해 본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김윤미 씨의 어려움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처음 시집왔을 때부터 함께 살았던 시누이는 어릴 적 사고를 당해 운신을 할 수 없고, 가족의 보살핌이 필요한 처지였다. 지금은 복지사업이 발전해 식사 도우미나 목욕 등을 도와주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그전에는 모두 가족들의 몫이었고, 대체로 김윤미 씨가 감당했어야 했다.

게다가 남편까지 투병 생활을 하는 처지였다. 7년 전 김윤미 씨의 친어머니가 돌아가셨단 소식에 장례를 위해 베트남 고향에 갔던 김윤미 씨에게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당뇨를 지병으로 앓던 남편의 증세가 나빠지면서 무릎 아래로 두 다리를 절단했다는 것이었다.

곧장 한국으로 돌아온 김윤미 씨에겐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족들과 생계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리를 잃은 남편,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 보살핌이 필요한 시누이. 그리고 자신의 어린아이들까지 혼자 책임져야 했다.

그때부터 김윤미 씨는 김 공장에서 일했다. 주야간 12시간 일하는 곳에서 야간일을 했었다. 그렇게 밤엔 공장에서 일하고, 낮엔 가족들을 돌보면서 4년을 살았다. 김공장은 겨울에만 일이 있기 때문에 여름엔 농사일을 하면서 지내야 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아들과 유치원생이던 딸을 돌보기 위해서라도 힘든 야간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런 김윤미 씨의 효행과 사정이 알려지면서 김 씨는 두 번이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진서면민의 날에서 효행상을, 2020년에는 어버이날 효행상을 받았다.

상을 받은 기쁨이야 있었지만, 힘든 삶은 달라질 것이 없었다. 먹고 사는 일은 막막했고 공장일과 집안일의 무한 굴레 속에서 열심히 달려도 경제적으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3년 전부터는 생활에 변화가 생겨났다. 시어머니의 치매 증세가 심해지면서 집에서 모시기엔 한계가 있었고, 요양병원에 모셨다. 병원에서 마지막 2년을 보낸 시어머니는 지난해 세상을 뜨셨다.

종일 지켜야 하는 치매노인이 안 계시니, 생활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었다. 김공장 일은 일정하지도 않았고, 언제까지나 밤새 일하고, 아이들을 돌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주위 사람의 권유로 운전면허를 취득하고, 3년 전부터는 부안읍에 있는 떡공장에 취직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있다. 하지만 가족 생계를 혼자 책임져야 하는 김윤미 씨에게 정시 출퇴근하는 공장 일의 수입으론 부족했다. 그래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진 떡공장에서, 주말엔 곰소에 있는 횟집에서 일하고 있다.

그렇게 가족을 지키고, 열심히 일하던 김윤미 씨에게 또 슬픔이 찾아왔다. 다리를 잃고, 투병생활을 하던 남편이 지난 3월 1일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나자 그동안의 고된 일로 쌓인 피로와 슬픔이 겹친 탓이었을까 몸이 아파 한의원에 다니며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하나둘 가족을 잃어가는 아픔이 무거운 일상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내는 과정인 그의 삶은 참으로 기구하다. 어떤 마음으로 그 생활과 이별을 감당하고 있을지 가늠해 보기 어렵다.

이젠 간호가 필요한 아픈 사람 없이 복지사들의 도움을 받는 시누이와 함께 자녀들만 바라보며 살 수 있는 김윤미 씨에게 어떤 삶을 바라는지 물었다. 그녀는 “그냥 지금처럼 열심히 살고 싶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크길 바란다. 지금처럼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고, 언젠가 아이들과 함께 고향에 다녀오고 싶다”며 소박한 바램을 전했다.

사랑으로 아픈 가족을 보듬고, 하루도 쉼 없이 고단한 삶을 감당해 온 그녀의 삶에 더 이상의 아픔은 없이 기쁨과 여유가 찾아오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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