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 / 솔바람소리문학회 사무국장
김혜영 / 솔바람소리문학회 사무국장

거울 앞에 선다. ‘아·에·이·오·우’, 입 주변 근육을 움직여본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어쩐지 낯설다. 표정을 바꾸는데 도움이 된다 해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연습하곤 한다. 모음을 발음할 때마다 드러나는 잇몸과 혀와 이빨 그리고 입가의 주름들이 볼썽사납기도 하지만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기에 벌써 며칠 째 연습 중이다.

어려서부터 고집이 세다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그 횟수가 더 많아졌다. 나잇값에 따른 아집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각진 턱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한때는 턱 성형수술까지도 고려했었다. 하지만 뼈를 깎아낸다는 생각만으로도 무서워서 생각을 접고는 했다. 그러다가도 거울에 비친 턱을 보면 금세 마음이 흔들렸다. 이렇게 갈등하던 차에 지인의 말은 충격이었다.  

그러니까, 어느 저녁모임에서 내 이야기가 나왔는데 첫인상이 차가워서 말을 걸기가 어렵다고 했다는 것이다. 평소 고집이 있어 보이는 사각턱도 서러운데 차갑게 느껴진다는 인상까지 입방아에 오르내리니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랴, 잘나도 못나도 물려받은 내 얼굴이고 내 몸인 것을. 하지만 표정은 노력으로 바뀔 수 있다는 말에 나는 오늘도 거울 앞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출근을 서두르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윗니가 드러나 보이도록 활짝 미소를 짓는다. 거울 속 얼굴이 더 어색해진 것 같다. 거울 속의 나는 웃고 있는데, 속사람인 나는 이렇듯 늘 울상이다.  

인사를 하며 강의실 문을 연다. 거울 앞에서 연습한 대로 미소를 지으며 수강생들과 눈을 마주친다. 허연 머리의 학생들이 멀뚱멀뚱 쳐다본다. 다시 한 번 잇몸이 나오도록 표정을 만들어 반갑다는 인사를 한다. 몇몇의 수강생들은 내가 음식을 잘못 먹었거나 아니면 쥐약이라도 먹었냐는 듯 쳐다본다. 더 이상은 이상야릇한 표정을 할 수 없어 본래의 얼굴로 돌아와 출석을 부른다. 대답하는 목소리마다에 세월의 주름이 느껴지는 아침, 결석 한 번 안하던 옥분 할머니가 대답이 없다. 할머니의 자리가 비어있다. 지난 수업 때 전화기를 들고 급히 밖으로 나간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일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교재용 페이퍼를 나누어준다. 평균 나이 70대 학생들의 투박한 손을 잡고 컴퓨터 마우스를 누르며, 표 만드는 것을 도와준다. 그러면서도 내 눈은 자꾸만 출입문 쪽을 향한다. 

쉬는 시간, 시간이 아깝다며 계속 자리에 앉아서 복습을 하는 학생, 경로당에 전화를 해서 점심 약속을 하는 학생, 자판기 앞에서 생강차를 기다리는 학생, 목적한 것만큼이나 그 표정 또한 제각각이다. 나 역시 심각한 표정으로 할머니의 전화번호를 찾아 누른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에도 무슨 큰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여러 번 통화를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그 후로도 옥분 할머니는 한 동안 소식이 없었다.

퇴근 하는 길 습관처럼 룸미러를 내 얼굴에 맞춘다. ‘아·에·이·오·우’를 반복한다. 문득 천양희 시인의 「뒤편」이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마네킹의 화려한 앞면이 있기까지는 무수한 시침을 받아내는 뒤편의 아픔과 고통이 있기 때문이라는 시행으로,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는 작품인 듯하다. 사람도 어쩌면 보이는 얼굴의 표정보다는 보이지 않는 마음 속 표정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나름 위로를 해보는 것인데 전화기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룸미러 속 표정을 물리고 시트 위 휴대폰을 들었다. 

“선상님, 저 옥분 학상이구먼요, 전화허셨는디, 못 받고……” 

활달하던 옥분할머니가 평소와는 다르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무슨 일 때문에 결석했느냐는 말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재차 어디 아프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어렵게 말을 이었다. 서울에 사는 딸이 전화기에 대고 숨넘어가는 소리로 대출을 해달라고 며칠을 볶아댔다는 것이다. 안된다고 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고 부족한 돈은 여기저기서 끌어다가 해주었더니 그날부로 전화번호가 바뀌고 연락두절이라고 했다. 어떤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강의를 하다보면 뜻하지 않게 여러 모양의 사연을 접하게 된다. 언젠가 가 보았던 옥분할머니 집을 떠올리며 핸들을 돌렸다. 구불구불 골목을 지나자 어둑한 방에서 TV 음영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계세요,” 

여러 차례 현관문을 두드렸다. 부러 대답을 안 하는 것인지 듣지 못한 것인지 기척이 없었다. 귀를 기울여도 텔레비전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119에 신고를 해야 할 것인지 망설이는 찰나 방안의 전등이 켜졌다. 현관이 환해지고 천천히 문이 열렸다.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문을 열고 마주한 할머니의 얼굴이 며칠 사이 더 늙어 있었다. 

저녁도 먹지 않고 누워 있었는지 힘이 없어 보였다. 할머니의 손을 끌어 차에 태웠다. ‘따뜻한 밥상’이라는 식당으로 향했다. 가정식 백반을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찬이 먼저 나왔다. 밥상 한가운데를 차지한 고등어구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애써 숨을 고르던 할머니가 들어가는 소리로 웅얼거렸다. 

“내 딸도 고등어를 좋아혔는디….” 

전답이 넘어가고 빚에 쪼들려도 괜찮으니 딸과 연락만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할머니. 그녀의 주름진 표정에서는 원망이나 미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마네킹이 뒤편에 시침을 품고 있는 것처럼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런 세월을 견디어야 저런 표정을 가질 수 있을까. 작은 일에도 분개하고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내 삶이 부끄러움으로 다가온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에 숙연해지는 저녁, 머잖아 닥치게 될 내 노후의 표정과 옥분 할머니의 표정을 겹쳐본다.

각진 턱에 째진 눈이라서 때로는 화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한 편의 글에도 문면 너머의 표정이 있듯 보이는 표정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표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옥분 할머니를 통해 깨닫는 저녁이다. 고등어 살점 한 젓가락을 할머니 숟가락에 올려놓는다. 옥분 할매의 마음 속 표정이 밝아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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