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환희 / 솔바람소리문학회 회장
라환희 / 솔바람소리문학회 회장

일정한 간격이다. 혼자 빠져나가야 하는 좁고 긴 산도産道 같다고 생각하니 말초신경까지 날을 세운다. 그럴 때마다 라마즈 호흡을 하듯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쉰다. 나는 지금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짊어지고 나온(?) 생산하는 자에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통과의례를 거치는 중이다. 아이들도 육체의 주기표를 이해할 나이라서 호르몬 변화가 느껴지면 꼭 이야기해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나는 원시 부족의 어미처럼 혼자 동굴을 찾아 들어가려 한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나를 낳기 위해서다. 옥죄어 온다. 

 다시 한번 산통이 옥죄어 온다. 다행히 오늘은 며칠 전보다 횟수가 줄어든 것 같다. 말로만 듣던 상한양증이 찾아온 것은 세밑이었다. 매듭지어야 할 일이 많은 연말이라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도 멎지 않은 열증으로 한겨울에 손부채를 꺼내놓고야 갱년기 증상임을 감지했다. 그렇게 체온이 널뛰기를 반복할 거라는 경험담들을 곱씹다 보니 몇 달이 지난 지금은 등줄기부터 시작한 불길이 상체에서 휘돌다가 빠져나가는 것을 그냥 바라볼 만큼 적응이 됐다. 등에 솟는 땀이 옷에 닿지 않고 척추를 따라 흘러내릴 수 있도록 등을 곧게 편다. 좀 전에 신었던 양말을 벗으며 열다섯 무렵에 시작한 여자의 삶을 돌아본다. 순식간에 지난 것 같은데 40년이다. 말초신경에 근이 배도록 운영되었던 생체리듬이 바뀌느라 이렇게 몸살을 앓은 것을 보면 결코 만만한 세월이 아니다. 

 따끈하게 데운 칡차를 앞에 놓고 몸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신열을 앓고 있는 여성성을 생각한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쓰다듬는다. 여자인 나는 고왔는가 혹은 거칠었는가.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여자를 칭할 때 비너스 같다고 말한다. 이를 논증하듯 상반신을 드러낸 밀로의 비너스는 여체의 美를 직접화법으로 보여준다. 이 작품은 곡선의 여성성을 예술로 승화시킨 예로 미의 화신이다. 반면 그와 반대인 비너스가 있다.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거나 사랑스러운 존재로서의 여자가 아니다. 생산자로서의 강한 능력자다. 역시 비너스라 불리던 여신이다. 이 후자의 비너스는 콧날이 오뚝하거나 팔등신이 아니다. 그냥 여성성이다. 

 처음 빌렌도르프 비너스를 봤을 때 느꼈던 내밀한 끌림을 잊을 수 없다. 비엔나 부근 빌렌도르프 도로 공사 중에 발견한 조각상은 유방이 과장된 임신한 여인상으로 얼굴이 흐렸다. 눈, 코, 귀, 입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두루뭉술한 낯에서 내 어머니를 본 날의 여운이 길다. 내 어머니는 이목구비가 없었다. 아름다운 것을 보는 것도, 좋은 냄새를 맡는 것도, 달콤한 말을 들을 일도, 단 음식을 먹을 일도 없이 산 모성. 시간이 더할수록 숙명적 여성성을 강조한 비너스에 오버랩된 내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어머니들은 어느 조각상보다 아름다운 생을 살아낸 비너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생에 있어 갱년기는 대부분의 남녀가 거치는 과정 중 하나다. 자웅雌雄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하는 호르몬의 감소로 지금까지 생산에 적합하게 운행돼 오던 인체가 불필요해진 기능을 삭제하는 단계다. 이 기간에 이르면 육체는 일시적으로 생채 리듬에 혼선을 빚게 된다. 특히 남성보다는 여성에 있어 그 자각 증상이 두드러진다는 말이 실감 나는 요즘이다. 일부 생체 기능이 포맷되고 재부팅되는 이 과정은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짧게는 몇 달부터 길게는 몇 년에 이르기까지 다운로드와 삭제를 반복한다고 하는 주변의 말에 맥이 풀린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과정의 일부인 것을. 

 거울 속 홍조 띤 나를 마주하다가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바꾸기로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은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생산하는 존재인 여성성에서 벗어나 이제 성을 초월한 사람으로 살라는 배려라 생각하니 심란했던 마음이 가신다. 기분 탓인지 오르던 열증도 잦아든다. 마침 거울에 투영되는 TV에서 봄을 맞아 출시될 신차가 화면 밖을 향해 질주한다. 광활한 대지를 가르는 매끈한 엔진소리에 눈길이 간다. 아무래도 내 갱년기, 재부팅 과정에 긍정의 아이콘이 설치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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