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희 / 솔바람소리문학회
이경희 / 솔바람소리문학회

아버지는 생강 싹을 틔우기 위해 지푸라기를 덮어놓았다. 수분이 날아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농부의 처방이었다. 6월 초순께 싹이 올라오는 생강잎은 얼핏 대나무 이파리와 비슷하게 생겼다. 여름이 되면 잦은 장마로 생강 잎은 노랗게 변하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일일이 누런 이파리를 찾아내어 병든 생강을 뽑아냈다. 그냥 두면 멀쩡한 것까지 번지기 때문이다. 애써 싹 틔워 손수 뽑아내는 심정이 오죽했을까.

요즘같이 장마가 계속되면 뒤란에 쪼그려 앉은 아버지를 더 자주 보곤 했다. 밭에서 뽑아온 거무스름한 생강을 수돗가에 쏟은 아버지는 틈새에 붙은 흙까지 수돗물로 깨끗하게 씻어냈다. 생강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아기 다루듯 껍질을 살살 문질러야 했고, 더디고 번거롭더라도 아버지는 그 일을 반복했다.

역사를 거슬러 고려 현종 때에는 전장에서 전사한 가족의 슬픔을 생강으로 위로했고, <난중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 모친상을 당한 이순신에게 완주의 생강이 선물로 보내졌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왕의 하사품이나 귀한 사람을 위해 생강을 선물했는데 그 또한 완주에서 난 생강이었다. 그만큼 완주의 봉동은 생강 역사의 진원지로 최적의 재배 조건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다른 지역보다 면역 증강의 효과가 뛰어남을 자랑했다.

한번은 친정에 가려고 택시를 탔었는데 기사는 봉동에 가면 생강으로 돈을 번 알부자들이 많다는 소문이 자자하다며 그 여파가 전주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생강 농사가 잘되면 그 돈으로 자식들을 건사하고 출가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장사치들은 떡잎만 봐도 아는지 생강이 다 자라려면 멀었는데도 미리 밭뙈기로 그것도 비싼 값에 사들였다. 아름아름 전해지는 소식은 아버지의 부러움을 샀다.

시월 말부터 시작해서 보름 가까이 수확을 마쳐야 하는 생강은 맛과 영양이 뛰어나 식탁에 없어서는 안 될 작물이었다. 연한 이파리와 생강대를 한 김 쪄낸 뒤 다져서 된장 한 숟갈로 쓱쓱 버무리면 씁쓸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이 그만이었다.

생강을 잘 보관하려면 먼저 주렁주렁 달린 수염 즉, 강수를 일일이 떼어내야 한다. 깨끗이 씻은 강수를 하루나 이틀 뽀얀 쌀뜨물에 담가 두면 하얀 수염 같은 때깔이 났다. 이 강수는 특히 생선요리에 곧잘 쓰였는데 생선찌개나 조림할 때 한 주먹만 넣어도 국물이 시원하고 칼칼해서 한번 맛본 사람은 그 맛을 잊을 수 없더랬다. 먹거리가 넘쳐나는 지금이지만 나는 아직도 그 맛이 눈에 삼삼하다.

강수를 다 떼어낸 다음에는 땅속에 넓은 공간을 만들어서 생강을 보관했다. 우리 집에도 마루 밑으로 깊은 동굴 하나가 있었는데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곳에 빠지면 못 나온다는 말에 괜히 겁을 먹었었다. 그 굴을 시앙굴이라고 불렀는데 다른 식구들은 엄두를 못 냈고 유일하게 아버지만 드나들었다. 아버지는 시앙굴을 긴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렸다. 여름에는 계곡물처럼 시원하고 겨울에는 김이 날 정도로 따뜻하다고 했다. 냉장고가 귀하던 시절, 시앙굴을 가진 집들은 냉장고 대용으로 쓰기도 했다. 어머니는 학독에 간 고춧물로 김치를 만들어 굴 밑으로 내려보내곤 했다. 맵고 싸한 생강도 적정 온도를 유지해주는 시앙굴 덕에 쉽게 부패하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호기심에 아버지를 따라 굴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생각보다 따뜻했다. 아버지는 헌 이불을 생강 위에 덮어 추위로부터 생강을 지키려고 했다. 굴속에 많은 양의 생강을 보관하다 보니 배출되는 유독가스가 골머리였다. 날이 더워지면 아버지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굴의 환풍을 위해 출입구를 개폐함으로써 씨생강을 지켜냈다.

마트에 가면 손쉽게 먹거리를 살 수 있는 요즘, 누군가의 밥상에 오르기까지 보이지 않는 정성과 손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비록 작은 양념일지라도 생강은 김치를 담그거나 깍두기, 무생채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재료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작은 것 하나에도 정성을 다하셨던, 시앙굴처럼 따스했던 아버지, 생강을 볼 때마다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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