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 / 솔바람소리문학회
최승자 / 솔바람소리문학회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려있는데 전화가 온다. 아들이 머뭇거리며 돈이 필요하다고 한다. 흘낏 시계를 보니 은행 마감 시간이 지났다. 이 시간에 그렇게 많은 돈을 어떻게 구하냐고 했더니 다른 데 알아보겠다고 전화를 끊는다. 줄였던 소리를 키우고 다시 TV 앞에 앉으니 보고 있던 프로그램은 이미 끝난 후다.

몇 해 전, 아들은 취직이 되어 대구에 갔다. 회사 기숙사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고 옷가방 하나만 들고 갔다. 어려서부터 들고 나는 일을 알아서 했던 터라 딱히 해줄 일도 없었다. 명절이나 휴가 때만 집에 오던 아들은 연립주택 꼭대기 층을 샀다고 했다. 깔끔하게 수리한다고 하더니 계획했던 것보다 일이 커지는 모양이었다. 공사비를 오늘 주기로 했는데 미리 마련하지 못했다고 했다. 아들이 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데 전화벨이 다시 울린다.

나는 집에 컴퓨터가 있는데도 사용할 줄 모른다. 웬만하면 전자기기는 쓰지 않는다. 만지는 것마다 고장을 내서다. 남편은 내 손에 가시가 달린 것 같다고 하지만 먼지만 살짝 닦아도 버튼이 튀어 망가지고 만다. 그러니 스스로 주눅이 들어 컴퓨터는 만지지 못한다. 키를 잘못 눌러 남편이 애써 모아둔 자료를 지워버릴까 봐 겁이 나서다. 요즘 컴퓨터는 클릭만 하면 실행이 된다지만 기계 앞에만 서면 막막해진다. 이런 내게 카드로 돈을 찾아 보내라니.

그보다 더 큰 일은 남편한테서 카드를 받아내는 일이다. 사실을 말하게 되면 일하는 녀석이 미리 준비해 두지 않고 어려운 상황을 만든다고, 덜렁대는 버릇을 내버려둔 내 잘못이 크다 할 텐데, 그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짚고 넘어가는 남편의 잔소리는 피하고 싶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궁리를 하는데 방바닥에 놓인 남편 소지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거기엔 신용카드도 있다. 얼른 집어든다.

나는 바로 집을 나서지 못한다. 뭐든 한 가지는 놓고 나와 다시 들어가게 된다. 기껏 자료들을 준비해 두고는 한 번 더 살펴본다고 꺼냈다가 빈 봉투만 들고 나가 낭패를 본다든가 일찍 나섰는데도 두고 온 물건이 있어 되돌아오는 바람에 지각을 하는 나를 식구들은 ‘승자답다’고 한다. 아들은 꼼꼼한 제 아버지를 두고 나를 닮았다. 늘 뭔가를 빠뜨려 챙겨 보내야 하고 오늘처럼 뒷심부름을 해야 하는 일이 잦다.

주머니에 카드를 넣고 살그머니 나온다. 초겨울의 저녁은 일찍 내려앉는다. 어둑한 빛처럼 내 마음도 무겁다. 은행 영업시간에 말했으면 수월하게 끝날 일이다. 그랬으면 이렇게 카드를 몰래 들고나오는 일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가끔 뉴스에서 보게 되는 남편 몰래, 부인 몰래 금융사고를 내는 일들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모양이다.

내가 아는 사람은 남편이 경제권을 쥐고 있는 데다 깐깐해서 가욋돈이 필요할 땐 맘고생을 했다. 자신은 그럭저럭 견딜 수 있는데 아이들을 달래야 할 때는 속이 상했다. 그런 그가 남편 몰래 아들에게 사업자금을 주었다. 될 듯 될 듯 일어서지 못하는 아들에게 이번만, 한 번만 하며 지원을 했었는데 주저앉고 나서야 남편이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말했더라면 그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을 거라며, 아버지의 정을 가린 아내라고 남편은 등을 돌렸다고 한다. 같은 공간에 살면서 그렇게 될 때까지 전혀 모를 수가 있었는지 궁금했었다.

농협365코너의 문을 민다. 지나다니며 쳐다보기만 했지 들어온 것은 처음이다. 매장의 셔터가 내려져 있어 격리된 공간엔 아무도 없다. 아들이 일러준 대로 자판을 누른다. 마음보다 손이 더 떨려 빤히 보이는 숫자를 잘못 누른다. 숨을 한 번 들이쉬고 길게 내뱉는다. 다시 또박또박 누른다. 두어 번 만에 송금을 마친다. 남의 도움 없이 기계로 돈을 보내다니, 누가 옆에 있다면 손이라도 마주치고 싶다.

숫자 0과 1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이 복잡해 보이고 정 없어 보였다. 나는 그것과 상관없이 살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가오는 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교통카드 충전하는 일도 개찰구를 통과하는 것도 다 연관이 있었다. 나이 들어 모른다고 핑계 대기에는 답답하고 놓치는 게 너무 많았다.

집에 돌아오니 남편은 내가 나갈 때 자세 그대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방에 들어가 카드를 꺼낸다. 남편 카드가 맞는지 확인을 하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돋보기를 찾아보니 제자리에 없다. 눈을 가늘게 뜨고 들여다보았지만 글씨가 너무 작다. 은행에서 썼던 카드도 이런 파란색이었던 게 생각나 제자리에 놓는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저녁상을 차린다. 남편을 부르지 않고 내가 밥상을 들고 들어간다. 말실수할까 봐 조용히 밥만 먹는다.

방바닥의 소지품을 정리하던 남편이 좀 전에 내가 놓아둔 카드를 손에 들고 자기 카드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눈만 껌벅거리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그것은 내 교통카드라고 한다. 얼른 내 옷 주머니를 뒤진다. 파란색 카드가 또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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