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 / 솔바람소리문학회 사무국장
김혜영 / 솔바람소리문학회 사무국장

가을이 멀어져 간다. 한껏 옷깃을 세운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지는 오후. 창밖으로 드는 여분의 햇살을 받으며 의자에 앉는다. 컴퓨터를 켠다. 메일을 열어 학생들의 과제를 확인한다. 수없이 알려주었는데도 글자 모양을 안 바꾼 아이, 하이퍼링크를 걸지 않은 아이, 쪽 번호를 넣지 않은 아이의 문서가 쏟아진다. 그래도 칭찬의 말을 담아 답글을 전송한다.

지난 봄, 나는 청소년지원센터로부터 학교 밖 청소년들을 가르쳐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학교밖 청소년이라는 말에 어렴풋이 감은 왔지만 구분하여 이름 한다는 게 달갑지만은 않았다. 어떤 학생들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매년 육만 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학교 밖으로 나온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을 두고 사람들은 ‘문제아’, ‘노는 애’, ‘비행청소년’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준다. 하지만 개중에는 남들과 다른 길을 선택하여 학교 밖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청소년들도 있다. 어찌되었든 새로운 얼굴을 만난다는 것은 생경한 풍경을 보는 일 같기도 하여 내심은 기대가 되기도 했다.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학교에서 자퇴하거나 퇴학을 당한 중·고등학생 일거라 생각했는데, 앉아 있는 학생들은 스무살 남짓의 성인들이었다. 모습들로 봐서는 구분할 수 없는데 왜 ‘학교 밖’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앉아 있는 것인지 고개가 갸웃해졌다. 출석부를 펼쳤다. 이름 옆에 쓰인 숫자가 눈에 띄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개가 열아홉에서 스물두 살이었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대학을 다니거나 취업했을 나이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수진이, 머리에 은행잎보다 진한 샛노란 물을 들인 혜주, 말없이 손톱을 물어뜯는 동건이를 비롯하여, 맨 뒤에 앉은 영찬이는 백 킬로가 넘어 보이고, 진경이는 수업시간인데도 이어폰을 끼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박자를 맞추고 있다. 아이들의 면면을 보니 앞으로 수업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았다. 

서먹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자기소개 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선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파워포인트에 들어가라고 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다섯 가지를 문장으로 쓰고, 맘에 드는 그림도 넣어보라고 했다. 노란 머리의 혜주는 귀찮은 듯 책상에 납작 엎드렸다. 그래도 나는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며 이름을 불러주기도 하고, 이것저것 또래의 관심사에 대해 질문도 했다. 경계를 하며 멈칫거리던 아이들이 차츰 마우스를 잡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쓴 글은 문장보다는 낱말이 대부분이었다. 침대, 강아지, 스마트폰, 술, 담배, 파이터……. 노란 머리의 혜주는 ‘침대’라는 단어를 썼다. 왜 그런 단어를 생각했는지 물었다. 혜주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너무 피곤해서 하루 종일 자고 싶다며 하품을 했다. 어떻게 수업을 이끌어갈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내 자식 같기도 하여 도와주고 싶었다. 청량한 목소리로 음악을 전하는 악동뮤지션이나 음식으로 눈과 입을 즐겁게 해주는 이연복 셰프, 소신 있는 배우 정우성과 같은 연예인들도 학교 밖에서 자기 꿈을 찾아 개척한 사람들이다. 

첫 수업이 끝나고 퇴근 길에 차 안에서 앞으로 열심히 해보자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결석만 하지 않으면 자격증을 딸 수 있게 지도하겠다는 메시지를 재차 보냈다. 답장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운전하고 오는 내내 전화기에 눈이 갔다.

밤늦게 알림음이 울렸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늦었다고 노란 머리 혜주가 답장을 보내왔다. 앞으로 결석하지 않고 열심히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없는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수업시간에 강의만 하면 그것으로 내 임무는 끝이지만 제도권 밖 아이들의 자격증 취득을 위해 무언가 계획을 세워야 했다. 매주 한 번 하는 컴퓨터 수업으로는 자격증을 취득할 수 없기에 매일 숙제를 내주고 이메일로 피드백을 계획했다. 

집에 컴퓨터가 없는 혜주는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다음 날 센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주어진 과제를 한다고 했다. 혜주의 과제를 받아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서툰 타자 솜씨로 한 타, 한 타 자신의 미래를 두드렸을 아이를 생각하면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컴퓨터 타자 연습에서 독수리타법보다 고치기 힘든 것이 바로 닭발타법이다. 혜주의 닭발타자는 검지와 가운데손가락, 엄지손가락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혜주의 양쪽 손가락을 기본 자리에 올려주었다. 손가락이 기억할 수 있도록 연습을 시켰다. 그래도 습관 때문인지 손가락 세 개로 치고 있다가도 내가 볼라치면 얌전히 손가락을 제자리에 올려놓기도 했다. 

이제는 제법 운지법에 맞게 자판을 두드린다. 양손가락을 써서 자유자재로 타자를 칠 수 있게 되면서 자격증 공부하는 것에 재미를 느꼈고, 타자 속도가 붙게 되자 더 많은 과제를 부여했다. 목표가 생기면서부터 혜주는 행동과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런 혜주를 보면서 내 자리를 더듬어 보는 것은 나 또한 대학원에서 닭발 타자법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혜주의 자격증 취득을 돕고 있지만 그 아이로부터 깨달음이란 자격증을 얻는 셈이니 결국 혜주가 선생이다.

창밖, 몇 남은 감잎에 노을이 얹힌다.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듯 위태롭게 흔들린다. 몇 번의 흔들림 끝에 감잎 하나 떨어진다. 습관처럼 일어나 멀어지는 감잎의 여정을 살핀다. 언젠가는 혜주도 저 감잎처럼 떠나갈 것이다. 그리고 봄이 오면 새싹으로 거듭날 것이다. 대학 입학이 꿈이 된 혜주의 얼굴이 떠오르는 저물녘, 일체가 선생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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