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7~8개를 넘나들었다는 상서면의 이발소는 이제 단 한 곳밖에 남지 않았다. 바로 상서면 소재지의 큰길에서 골목길로 조금 들어서서 자리한 상서 제일이용원이다.

1996년부터 제일이용원을 인수해 지금까지 홀로 문을 여닫으며 지키고 있는 박송배(75) 이발사를 만났다. 

손쉬운 기계보다는 수백 수천 번의 가위질로 머리를 다듬고, 하얀 거품을 묻혀 퍼렇게 날이 선 면도날로 티 없이 깨끗한 얼굴을 만들어주는 면도로 마무리하는 것이 이발소의 흔한 풍경이다. 

그는 “예전 많을 때는 정말 밥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을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하루 1~2명밖에 찾지 않는다”며 “그래도 뭐 평생 해오던 일이니 그냥 하는 것이고, 누가 배우거나 물려받을 일이 없으니 내가 그만두면 이용원은 문을 닫게 되지 않겠나. 나도 뭐 문 닫고 쉬기만 하면 뭐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라며 오래된 이발소를 지키는 이유를 전했다.

파랗게 날 선 면도날로 깨끗한 면도까지 해주는 것이 제일이용원의 이발 코스다.
파랗게 날 선 면도날로 깨끗한 면도까지 해주는 것이 제일이용원의 이발 코스다.

시골집 한 칸을 차지한 제일이용원에 들어서면 모든 것이 낡은 듯하지만, 그렇기에 요즘 보기 드문 것이 많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커다란 거울도 요즘의 것과 사뭇 다르며 얼마나 오래된 것일지 가늠하기 어려운 이발 의자, 30여 년 전 그가 취득한 이용사 자격증이 든 액자, 이발 가위와 면도기 등이 들어있는 소독 기계 등등 이곳의 역사를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박송배 이발사와 마찬가지로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예전에는 남자들은 으레 이발소를 찾아 머리를 잘랐다고 한다. 그러나 점차 많은 남성이 미용실을 이용하게 되면서 이발소는 하나둘 사라져갔다. 요즘 남성들만이 찾는 이발소는 유행에 맞게 바버샵으로 이름과 스타일을 바꿔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멋을 만들어내는 공간. 상서 남자들의 멋을 책임지던 공간이 제일이용원이다. ‘남자는 머리 빨’이란 외모에 관한 말이 널리 쓰인다. 이는 헤어스타일이 그 사람의 외형에 그만큼 큰 영향을 준단 뜻일 거다. 그런 점에서 제일이용원은 상서 남자들에게 멋의 출발점이었다. 

그렇게 중요했던 이발소가 상서면 소재지에만 세 곳이었던 때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제일 이용원만 남았다. 이곳도 하루 1~2명의 손님만 찾아올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어쩌면 농촌인 이곳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고, 젊은 세대보다 나이든 세대가 많이 남게 된 흐름과 함께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유행이나 교통 등 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이 더해져 이곳 상권의 축소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삼성옥, 금성옥, 부레옥, 금여관 중국집과 숙박업소 등 번성했던 상권은 비교할 수 없이 작아져 버렸다.

그렇지만 박송배 이발사는 굳건히 이곳을 지켰다. 한창 이발소가 성행하던 때는 하루 2~30명 손님이 몰려들며 심지어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이 일하던 때도 있었다. 특히 방학이 끝나던 때나 명절 전이면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손님이 아니더라도 이용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화투를 치는 등 온갖 지역 소식이 오가던 사랑방 역할도 톡톡히 했었다고 한다.

제일이용원의 오랜 역사만큼 낡았지만, 정겨운 간판 앞에서 포즈를 취한 박송배 이발사
제일이용원의 오랜 역사만큼 낡았지만, 정겨운 간판 앞에서 포즈를 취한 박송배 이발사

박송배 이발사는 1950년 감교리 청등마을에서 태어났고, 아직 어린 중학교 시절 머리 자르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다른 마을인 봉은에 있었던 이발소까지 걸어 다니며 일을 배웠고 열다섯 시절 월급으로 500원을 받으며 일을 시작했다. 

일을 배우는 시간을 거쳐 본격적으로 자기 일을 시작했던 것은 1976년 보안면에서였다. 이후 1996년 이곳 제일이용원을 인수했는데, 그에 따르면 정문갑 씨, 박형수 씨에 이어 세 번째 제일이용원의 주인장 이발사가 됐다.

거의 평생을 다른 사람의 머리를 매만지며 멋진 모습을 만들어주던 그의 이발사로서의 삶이 거의 마지막에 다다른 듯하다.

“언제까지 이발소 문을 열 것인지”묻자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2024년, 그러니까 내년 쯤엔 정말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쓸쓸히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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