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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그리고 쉼표] 아이들과 지렁이
  • 오명연(행안초등학교 교사) 
  • 승인 2008.04.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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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모레가 식목일이다. 아직도 서리가 내리는 차가운 날씨지만, 명색이 식목일인 관계로 실과 시간에 꽃씨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찬바람이 쌩쌩 불었는데, 오늘은 우리가 파종(?)을 할 줄 알았는지 햇볕이 따스하다.

모종삽을 들고 장갑을 끼며 신나게 나가는 아이들을 앞세워 주사님께서 만들어 놓은 부엽토 더미 앞에 선다. 화분을 챙기며 콧노래를 부는 아이들의 손은 어느새 부엽토 더미를 헤집고 있다. 서두르는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화분 바닥에 납작돌을 깔아야 한다는 둥 설명을 하고는 드디어 실습시간!

누가 삽질을 해 흙을 퍼 담을 것인지 정하는데 우리 한빈이가 손을 번쩍 드는 게 아닌가? 엊그제까지 감기가 심하게 걸려 제대로 서 있지도 않았는데 삽질을 하겠다고 한다. 뭐, 남자라고 한빈이 밖에 없어서 흔쾌히 승낙을 했다. 일반적으로 여자 아이들은 흙 만지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한빈이가 삽질을 몇 번 하기도 전에 비명 소리가 터졌다. 잠시 꽃씨를 보고 있던 나는 비명 소리에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손가락으로 뭔가를 가리키며 상기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여자아이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지네에 물렸나?’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 아이들은 비명을 지른 것이 아니고 환호성을 지른 것이다. 바로 지렁이를 보고. 세상에! 지렁이를 보면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징그러워하며 도망가지 않던가? 6학년씩이나 된 여자아이들이 지렁이에 환호하며 달려드는 것이다.

그때부터 지렁이의 수난 시대는 시작되었다. 화분 속에 지렁이를 넣으면 식물이 더 잘 자란단다. 맨손으로 나뭇가지를 들고 아이들은 지렁이 잡기에 열을 올렸다. 한빈이는 땀까지 흘려가며 신나게 여기저기를 삽질하고, 여자 아이들 셋(우리 반은 모두 5명, 1명은 다른 수업에 가 있는 시간이었다)은 부엽토 더미를 뒤졌다. 길다란 화분 3개를 만들었는데 아마 화분 1개에 지렁이 10여 마리는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7차 교육과정을 학교에서 가르치지만, 예전 6차 교육과정에서는 4학년 과학에 지렁이의 생김새와 습성에 대해 배우는 단원이 있었다. 이 단원은 의례 비명소리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신음소리 등이 함께 혼재하는 아주 번잡한 시간이 된다.

예전에 인천에서 근무할 때는 남학생 한 명이 앞에 있는 여학생을 놀리느라 지렁이를 던졌다가 여학생이 놀라 비명을 지르고는 실신한 적도 있었다. 그 때 생각을 하며 우리 아이들을 보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지렁이가 그렇게 좋아?”
“예! 새끼 지렁이는 얼마나 귀여운데요!”

나뭇가지나 모종삽으로 지렁이가 잘 안 옮겨지니 손으로 집어 화분에 넣는 모습을 보며, ‘그래, 이것이 시골 학교 다니는 맛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이제 지렁이가 부지런히 헤집고 다니는 우리 화분에서는 곧 나팔꽃과 매발톱이 파란 싹을 틔울 것이다. 올해 우리 반에 나팔꽃과 매발톱 꽃이 예쁘게 핀다면, 그것은 모두 지렁이의 공이다.

오명연(행안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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