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댁, 들어올 때 빵하고 음료수 좀 사다줘.” “언니, 오면서 돼지고기 2근만 떠와.”

잡다한 심부름도 흥이 나던 오뉴월. 모내기로 바쁜 이웃들의 발이 되어 신이 났던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치 수확을 기다리는 농부처럼….

이미 제주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그 기세를 몰아 뭍으로 올라온 태풍이 긴 장마를 막 끝낸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빗줄기는 줄기차게 굵어졌다 가늘어졌다를 되풀이하고 바람까지 슬슬 빗줄기에 맞장구까지 칩니다.

일머리를 전혀 모르는 나도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밤새내 비가 내린 뒤 아침이면 일찍 아침밥을 먹고 동네 한 바퀴 돌아봅니다. 가슴이 시립니다. 유독 일욕심이 많은 어른들의 논에 UFO자국이 나 있습니다.

바람의 유혹에 못 이겨 살포시 옆으로 누운 벼들이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따다 만 고추들은 가지에서 붉게 물들어 물렁해졌습니다. 얄궂은 햇빛에 요령껏 고추를 말려보지만 때깔이 나지 않습니다. 여기 저기 한 숨소리만 들립니다. 골목 담벼락 위의 흰 박꽃이 뜸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서늘한 바람기와 함께 가을이 시작되었습니다. 비로소 가을이 되었습니다.

이내 걱정은 바쁜 일손으로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일손이 걱정과 한숨을 희망의 노래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몇 년전까지만 하더라도 나에게 있어 가을이란 늘 ‘떠나가고 있는 계절’이었습니다. 투명한 햇빛과 소슬한 바람결 속에 하얀 억새꽃이 떠나가고, 코스모스 한가로운 시골길 너머로 떠나가고, 낙엽 지는 산사의 아득한 고요 속으로 떠나가고. 잎 지고 열매 지고 누런 논배미들의 볏단들까지 사라진 빈 들녘너머로 가을은 그렇듯 늘 가고 없는 외로움이었습니다.

허나 지금은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나누어 먹을 이웃이 있고, 마음 속 깊은 은밀한 이야기도 나눌 동무가 있어 가을이 기다려집니다. 그 가을이 깊어지면 동네 밭둑께의 쑥부쟁이 억새꽃 들국들의 한가로운 몸짓에 나 또한 한가로이 마실 떠날 준비를 합니다.

누런 들녘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가을 걷이가 시작되면 나의 여행도 시작됩니다. 내 이웃과 동무들의 희망찬 내일을 위하여…. 지난 여름의 고단함도 함께 지고 어느 산굽이길 돌 탑이에 또 하나의 돌멩이를 얹어놓습니다. 또 한 번의 가을이 왔습니다.

가을 하늘에 감사드리며 풍요와 정으로 가을 걷이 잘 마무리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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