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오영/솔바람소리문학회
전오영/솔바람소리문학회

 바위에 내려앉을 듯 말 듯한 나비 형상이 실제보다 더 실제 같다. 더 가까이 다가가 섬세함과 마주한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집중을 가른다. 도예 작품에서 시선을 옮겨 소리를 좆는다. 분홍 머리띠를 한 아이가 비닐봉지 속에서 작은 나비 모형을 꺼내고 있다. 
전시장 입구 안내 데스크에서 어린이에게 나눠주던 것인데, 그 아이는 선물을 받자마자 벽면의 나비 작품들을 향해 달려갔었다. 형형색색 나비들이 날아오르는 장면을 형상화한 그 작품이 아이에게 호기심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투명한 비닐봉지 속에서 노란 나비 모형을 꺼낸 아이는 벽면의 나비와 제 손의 나비를 번갈아 바라본다. 
무의식에서 비교하게 되는 내 오래된 습속을 생각하며 다른 작품 앞에 선다. 갈색 상자 위로 노란 나비들이 날고 있다. 그 옆 새장 속 나비 작품이 시선을 끈다.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을 통해 모든 거처는 안온함의 상징이라 언급하였는데 새장 속 나비는 안온할까? 구속과 자유를 상징하는 대비가 내 삶의 공간을 두리번거리게 한다.
수년 동안 문화회관을 오가며 다양한 전시 안내 플래카드를 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무심히 지나쳤었다. 그런데 나비를 테마로 한 이번 전시회는 다르게 다가왔다. 
벽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액자 속 나비들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날개를 펼치고 있다. 타원형의 화강암 옆 나비의 형상에서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중력에 순응하는 것과 중력을 거스르는 주제의 동선을 헤아려본다. 다른 곳에 배치된 나비보다 유독 날개가 무거워 보인다. 삶은 무거움을 벗는 일이며 결국 가벼운 곳을 찾아야 한다는 듯 작품 속 날개가 곤고하다. 내 어깻죽지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다. 반복의 일상성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은 내 욕망의 날개와 닮은 것도 같다.
그날 산길은 전에 없이 호젓했었다. 참나무 곁으로 담상담상 피어 있는 진달래가 일상에서 찌든 마음을 씻어주는 것 같았다. 완만한 경사를 지나 다소 가파른 중턱을 넘고 나자 평평한 오솔길이 이어졌다. 때맞춰 불어온 바람은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좀 더 강한 바람이 가슴에 닿는 순간, 풀숲에서 나비들이 일시에 날아올랐다. 나비 떼의 비상이 고요한 숲을 깨우는 듯했다. 바람결인 듯 ‘오상아吾喪我’라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숨죽임도 잠시, 나비들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한동안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환영으로 남은 허공을 바라보았다. 헤르만 헤세는 나비를 덧없는 아름다움이라 했던가.
살아가면서 나비의 가벼움이 그리움으로 연상되곤 할 때면 이루마의 피아노 연주곡 Papillon을 찾아 듣곤 한다. 제목이 주는 각별함도 있지만 그의 곡을 따라가다 보면 건반 위로 나비들이 날아다닐 것 같아서 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날갯짓 너머의 영원한 자유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서다. 이 음악을 듣다보면 또 하나의 장면이 떠오르곤 한다. <빠삐용>이란 영화인데, 주인공 샤리에르의 가슴에 새겨진 나비문신이 강렬함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빨이 다 빠진 빠삐용에게 문신은 상징 같은 것으로 외딴 섬 절벽의 두려움도 이겨낸 자유에로의 의지 같은 것이다.
감옥이라는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던 빠삐용은 결국 백발이 다 되어서야 탈옥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자유는 무엇일까. 세상으로의 탈출이 그가 머물렀던 갇힌 공간과 다를 것 없는 이첩된 공간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될 때가 있다. 빠삐용의 자유의지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진 관습화된 자유라는 사유에 닿을 때면 나비의 가벼움에 대한 동경도 한낱 부질없는 습속의 전유물로 전락되곤 한다. 삶의 질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희망보다는 차라리 절망이 희망이지 싶다. 때문에 선자는 虛·無·空과 자비와 사랑을 언급했지 싶기도 하다. 
무엇을 결론할 수 없을 때, 가장 무난한 결론인 무엇을 무엇이라 하지 않는 순한 바람이 반쯤 열린 쪽창으로 들어온다. 그러나 생이라는 내 마음 상자에 가득 찬 욕망이 삶을 움켜쥐고 놓지 못한다. 오늘처럼 나비 앞에서의 멈춤도 나비인형을 쥔 저 어린이 같은 내 어린 날의 순수이기보다는 내 의식의 무거움에서 오는 것일 터, 또 하나의 집착이 화강암에 눌리는 것 같다. 
전시 마감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스피커를 타고 천천히 출구로 향한다. 갇힌 나를 버리고 자유로운 꿈을 꾸라는 장자의 말이 앞선다. 어디에 두었는지 아이의 손에는 나비가 없다. 나와는 달리 아이의 걸음이 아까보다 더 가벼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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