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껍질 위에 붙어있는 지의류
나무껍질 위에 붙어있는 지의류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를 만드는 우정에 관하여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서로에게 호의가 있어야 한다. 두 번째, 호의가 있는지 서로 알아야 한다. 아무리 사랑한들 죽기 전에 그 사실을 알면 무슨 소용인가. 세 번째, 소금 한 가마니를 먹을 정도로 오래 사귀어야 한다.
오늘의 제목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인 이유도 이 세 번째 우정의 조건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요즘 숲을 산책하면서 ‘이 정도면 서림공원에 대해 어느 정도 알았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최근 숲에서 있었던 일련의 경험들이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숲과 내가 같이 알고 지낸 지 한 해가 채 되지 않았다. 서림공원에 대한 호의는 넘치지만 아무리 짜게 먹는다고 해도 소금 한 가마니를 다 먹기엔 서림공원과 보낸 시간이 너무 짧다.

털머위 줄기와 꽃
털머위 줄기와 꽃

털머위-오래 두고 보아야 알 수 있는 것들
공원으로 올라오는 가파른 경사가 있는 길가에 털머위꽃이 폈다. 국화과라서 향이 진하다. 얼마 전에 이 자리에 옥잠화꽃이 피어서 날 유혹하더니, 옥잠화가 지고 나니 이제 털머위가 제 차례를 기다렸다는 듯 꽃을 피운다. 다른 꽃들은 지기 시작하는 가을 무렵 봄꽃, 여름꽃 봤던 눈 둘 데 없을까 봐 크고 화려한 꽃을 피우고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는 것이 마치 속 깊은 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거기에 하나 더. 털머위는 한겨울에도 꿋꿋하게 초록을 남겨둘 것이다. 추위에 풀들이 생을 다 하고, 나뭇잎은 곧 낙엽이 되어버린 벌거벗은 숲이 너무 초라하지 않도록 말이다. 오래 두고 보아야 진가를 알 수 있는 식물이다.

목서의 잎과 꽃
목서의 잎과 꽃

목서-알고 보니 호랑가시나무가 아니었던
며칠 전 산책을 하다가 달콤한 향이 나길래 주변을 살피다 향기가 나는 꽃을 찾았는데 바로 호랑가시나무라고 생각했던 나무였다. 그런데 꽃 모양으로 봐도, 꽃을 피우는 시기로 봐도 호랑가시나무가 아니다. 사진을 찍어 이미지 검색도 해보고, 사무실에 돌아와서 여러 자료도 찾아본다. 알고 보니 ‘목서’라는 나무였다. 뾰족뾰족한 나뭇잎만 보고 지금껏 호랑가시나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이 나무가 이렇게 달콤한 향기를 내뿜지 않았더라면, 그날 그 나무 앞을 지나지 않았더라면 계속해서 이 나무를 호랑가시나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목서의 향기는 멀리서도 맡을 수 있다. 이맘때 산책을 하다가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가 나면 근처에 목서가 있구나 짐작할 수 있다. 다음 날 차를 타고 군청 앞을 지나는데, 역시나 이 향이 나길래 주변을 살펴봤더니 군청 앞에 목서 몇 그루가 심겨 있었다. 멀리서 스치듯 지나가도 달콤한 향을 내뿜는 목서꽃 덕분에 잠시 황홀경에 빠졌다. 

지의류-곁에 있지만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것들
내가 있는 사무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면 소나무와 참나무가 있는 울창한 숲이 보인다. 그런데 요새 갑자기 궁금증을 자아내는 어떤 한 개체가 있었으니, 나무 기둥 여기저기에 꼭 시멘트를 발라놓은 것 같기도 하고 곰팡이 같기도 한 것들이다. 갑자기 정체가 궁금해졌다. 마침 같이 일하는 동료 선생님과 같이 산책하다가 물어보니 너무나 간단하게 ‘지의류’라고 답해주신다. 식물 관련 책에서 자주 본 단어여서 익숙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그리고 흔하게 지의류를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지의류는 균류와 조류가 공생하는 생명체다. 균류라 하면 곰팡이나 버섯을 생각하면 되고, 조류는 바다의 녹조류를 생각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균류는 혼자서는 광합성을 못 하고 포자로 번식한다. 조류는 광합성을 할 수 있지만 습한 환경에서만 살 수 있는데, 수분이 증발하는 것을 막아서 건조한 바위나 나무껍질에서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균류이다. 지의류는 생명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든 있다. 그리고 생명이 살기 힘든 화산지대나 극지방, 사막과 같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살 수 있다. 이런 지의류의 강인한 생명력이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지의류가 가진 유전적 특성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렇게 지의류에 대해서 알고 나니 나무껍질이나 바위도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다. 눈을 바짝 대고 지의류를 관찰해본다. 가까이에서 보니 마치 태초의 지구를 하늘에서 보고 있는 듯하여 경이롭기까지 하다. 너무 당연해서 못 보고 지나치는 소중한 존재들이 우리 삶에는 얼마나 많은지 새삼 깨닫는다.
오늘도 이렇게 서림공원과 하루를 보냈고, 우리의 우정이 딱 하루만큼 더 쌓였다. 내가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한들 세월로 증명해내지 않으면 채울 수 없는 그 무엇이 우리의 삶에는 있다는 걸 오늘도 숲이 넌지시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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