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풀 씨앗
조개풀 씨앗

한가위가 지나고 들판은 추수가 한창이다. 우리 동네 농부들에게 들어보면 작년만큼은 아니지만 올해 날씨에 비하면 수확량이 나쁘지 않다고 한다. 햇살이 따갑도록 비추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추수철이 되면 시골에선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들에 있는 먹거리를 갈무리하는 일이다. 부지런히 해서 지금 곳간을 채워놔야 1년 내 먹을거리가 풍족해진다. 내가 사는 아파트 주차장 한쪽에는 깨끗하게 손질된 토란대, 들깨, 팥, 녹두가 매일 번갈아 가며 널려있다. 뉘 집인진 몰라도 두 식구는 1년 동안 잘 먹겠다 싶어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이렇게 바람을 맞으며 햇볕에 말린 먹거리는 품은 많이 들지만, 기계를 써서 말리는 것보다 맛은 훨씬 좋다.
숲속 동물들은 겨울을 어떻게 준비할까. 집단생활을 하는 개미나 일부 벌들은 우리네처럼 봄부터 가을까지 먹거리를 차곡차곡 쌓아두지만 대부분 그때그때 먹거리를 찾아다니거나 땅속이나 굴에서 겨울잠을 잔다.

동백나무 열매
동백나무 열매

서림공원은 겨우내 동물들의 먹이가 될 열매들이 무르익고 있다. 인동덩굴, 찔레, 새박 같은 덩굴식물과 노린재 나무, 감태나무, 쥐똥나무의 열매들은 새들의 귀한 먹이가 될 것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주로 벌레를 잡아먹으며 영양분을 충분히 섭취하고, 겨울이 되면 이런 열매를 먹으며 살아간다. 열매를 먹은 새들은 똥을 누어 씨앗을 멀리 퍼뜨려줄 것이다. 공생이다.
이제 슬슬 낙엽을 가지고 놀 때가 다가온다. 아직 세가 약한 나무들은 잎이 다 떨어져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고, 큰 나무들은 해를 덜 받는 밑쪽 가지부터 잎을 떨구어 듬성듬성한 모양이다. 뿌리로부터 가장 멀지만, 하늘에서는 가장 가까운 나무의 꼭대기를 ‘우듬지’라고 하는데, 어쩌면 100년도 훨씬 전에 나온 뿌리로부터 양분을 받아 다음 생을 이어가기 위해 가장 앞에서 비바람과 햇빛을 맞으며 마지막까지 잎을 붙잡고 있는 우듬지가 용기 있게 느껴진다. 숲에서 알게 된 친구의 숲 이름이 우듬지인 이유도 새삼 알 것 같다.

동백나무 열매 벌어진 모습
동백나무 열매 벌어진 모습

무르익은 열매가 씨앗을 퍼뜨리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동백나무나 솔방울, 편백 열매들은 과육이 익으면서 벌어져 씨앗이 떨어진다. 그중 동백나무 열매는 벌어진 모양이 꽃 모양과 비슷하여 꾸미기 재료로 쓰인다. 그런데 내가 봤던 동백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아 직접 본 적이 없어 봄부터 서림공원의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요새는 산책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오늘은 철모르고 피어난 동백꽃 한 송이 덕에 꽃과 잎, 열매, 씨앗 그리고 꽃망울을 한 번에 볼 수 있었다. 이런 순간이 나에겐 행운이자 행복이다.
걷다 보니 신발과 옷에 씨앗이 잔뜩 붙어있어 다시 걸어온 길을 거슬러 가본다. 조개풀이다. 조개풀은 주름진 모양이 조개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길가에 흔하게 많이 나 있는데 이 식물이 이렇게 번성한 이유는 씨앗이 이동하는 동물과 사람 몸에 스치기만 해도 잘 붙었기 때문일 것 같다. 질경이도 비슷한 전략을 쓰고 있다. 조개풀과는 달리 씨앗에 솜털 가시가 없는 질경이는 일단 사람들이 잘 다니는 길 한가운데 피어있어 밟고 다니기가 쉽다. 그때 신발 바닥에 씨가 붙어서 이동한다. 질경이를 차전초(車前草)라도 하는데 수레바퀴가 지나가도 죽지 않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밟혀도 잘 산다는 뜻이다.
이제 슬슬 낙엽을 가지고 놀 때가 오고 있다. 아이들과 숲에서 바스락바스락 낙엽을 밟아보고, 푹신푹신한 낙엽 위에 누워 보고, 낙엽 더미에 묻혀 보고, 낙엽을 모아 여러 가지 모양도 만들어보고, 모은 낙엽을 머리 위로 던지며 놀 수 있는 날이 곧 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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