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 / 솔바람소리문학회 사무국장
김혜영 / 솔바람소리문학회 사무국장

가을볕이 저물어간다. 이때쯤, 그것도 노을이 뉘엿거리면 나는 마음이 바빠지곤 한다. 암수술을 한 아버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주 찾아뵙지 못한 죄송스런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수술 후 시간이 지날수록 옛날과는 다르게 힘이 부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곤 한다. 예전 같으면 절기에 따라 농사일을 준비하셨을 텐데 이제는 달력에 표기만 할 뿐 해야 할 일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멀거니 이울어지는 들녘에 시선을 둘 뿐이다.
몇 해 전, 친정아버지의 암수술은 나를 긴장시켰다. 적잖은 연세이기에 정기 진료를 요청했으나 번번이 아버지는 나를 비롯 가족의 염려를 돌려세우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설마, 설마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점점 기색이 쇠해지고서야 아버지는 병원을 찾았다. 진단 결과 위암이었다. 결국 병이 깊어지고서야 병원을 찾은 것이다. 병은 알리고 싸움은 말리라는 말처럼 알려야 할 당신의 병을 쉬쉬 감추고 살아오신 게 화근이 된 것이다. 차츰 통증이 심해지고 기력이 쇠해진 아버지는 당신의 생명과도 같은 부지런함과 농기구를 내려놓고 결국 병원에 몸을 맡겼다.
여느 자식인들 부모의 수술실 앞에서 태연할까마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내내 나는 초조했다. 강하게 아버지를 채근하여 진료를 받게 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드문드문 머리에 모자를 쓴 환자들이 눈에 띄었다. 환자도 보호자도 모두 표정이 없거나 굳어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조금만 잘못하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 역시 입이 말랐고, 쉽사리 꺼질 줄 모르는 수술 표시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무엇인가를 이처럼 길게 응시한 적 있었던가.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아버지와 함께 한 기억이 물밀어 왔다. 무엇보다 가족과 오순도순 잘살지 못하는 내 모습이 부끄럽고 후회스러웠다. 코끝이 찡해지며 수술중이라는 문구가 흐릿해질 때쯤 수술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인 듯한 사람이 보호자를 찾았다. 수술을 마친 아버지는 이동 침대에 누워 눈빛을 내 눈에 맞추었다. 배고픈 시절 보릿고개를 살아낸 쇠심줄 같은 의지 때문인지 아버지의 눈만은 또렷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를 하염없이 내려다 볼 뿐, 나는 무슨 말이든 해야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회복실로 옮기는 동안 침대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감사하고 새로웠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의사의 진단과는 다르게 회복이 빨랐다.
미음에서 흰쌀밥으로 옮기면서부터 아버지는 병원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두고 온 농사일 때문인데, 의사의 회진 때마다 퇴원을 되묻곤 했다. 결국 예정일을 앞당겨 퇴원했다. 마당의 풀도 텃밭의 푸성귀도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점점 회복되어 갔고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오랜만에 아버지를 찾았다. 군대에 간 조카가 휴가를 얻어 인사차 왔는지 토방에 군화와 함께 못 보던 신발 몇 켤레가 보인다. 마늘냄새가 마중한다. 헛기침을 하며 들었다. 언니와 형부 그리고 군복을 입은 조카가 아버지와 함께 둘러 앉아 있다. 종자로 쓸 마늘을 분리하는 중이었는지 방 가운데에는 마늘이 쌓여 있었다. 나도 비집고 들어가 앉아 이런저런 너스레를 늘어놓았다. 가끔 말이 끊어진 사이를 문틈으로 들이치는 바람소리와 시계의 초침소리가 끼어들기도 했다. 마늘냄새와 여담에 동화된 지 한 시간 남짓, 아버지의 앉은뱅이 의자가 불편한 듯 흔들리고 조카도 다리에 쥐가 나는지 엉덩이를 들썩인다.
수북하게 쌓여 있던 통마늘이 거의 사라져 갈 무렵 아버지는 키를 챙기셨다. 그리고는 마당 모퉁이에서 바람을 등지고 키질을 하셨다. 마늘의 무게 때문인지 굵고 실한 것은 키 안쪽에 모이고, 잔 마늘은 키 앞자리에 위치한다. 아버지는 굵고 실한 마늘은 종자용으로 자잘한 것은 식용으로 쓸 거라며 무더기무더기 쌓아 놓으신다. 아버지의 키질에 내 유년의 기억이 실한 마늘 종자처럼 오버랩된다. 
어렸을 때 빙판길에 넘어져 다리를 다친 적이 있었다. 그런 연유로 한동안 아버지는 나를 오타바이에 태워 등하교를 시켜 주셨다. 추운 겨울 모자를 씌워 주고 옷을 단단히 여며 주셨지만 속도를 견디지 못한 매서운 바람은 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애써 좁은 등을 더 넓게 펼쳐 바람을 막아주셨다. 그때는 당연히 그렇게 해주는 것인지 알았다. 생각해보면 그때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낸 아버지의 가슴은 얼마나 시렸을까. 어디 시린 게 그 바람만 이었을지, 지금 생각해보면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을 절감하게 된다.
키질하는 아버지의 팔이 무거운 듯 느려진다. 가족을 위해서 평생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키질을 하셨던 아버지. 어쩌면 올해의 저 키질이 아버지의 마지막 키질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눈앞이 어른거린다. 멀리 지평선에 아버지의 노을이 사위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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