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서면 양산마을에서 평생 농사지으며 살아온 김춘기 어르신은 요즘 말로 ‘얼리어답터’다. 평범한 시골 마을의 지금은 여든이 넘는 어르신이 1980년대부터 비디오카메라로 마을의 모습, 일상과 특별한 행사 등을 영상으로 남겼다.
어르신은 컴퓨터를 잘 다뤄 옛날부터 지금껏 촬영했던 영상과 사진 자료들은 모두 외장하드에 갈무리해두고 TV로 연결해 종종 열어보곤 한다. 여든이 넘은 어르신이 80년대부터 비디오카메라로 영상을 촬영한 것도 신기한데, 이를 컴퓨터로 정리하고 열어보는 방식은 더 놀랍다.
도대체 어떻게 무려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 태어나 한국전쟁까지 겪었던, 무려 여든넷의 어르신이 어떻게 지난 삶을 영상으로 남기고, 파일로 간직하게 된 건지 무척 궁금해졌다.
같은 나이대의 평범한 어르신이라면 집안에 옛날 사진이 있더라도 앨범 한두 권에 몽땅 넣어 보관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하지만 정리와 분류가 몸에 배어있고 어려서부터 기계에 익숙할 기회가 많았던지라 남들보다 빠르게 기계를 다뤘고, 컴퓨터도 익혔다.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농사를 평생 지어왔다. 우덕초등학교와 삼남중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생 나이였던 그는 농사가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에 광주에 있는 기술전문학원을 다녔다. 그곳에선 전자제품, 특히 라디오 만드는 일을 배웠다.
라디오 스피커는 당시 진공관이라는 방식이 보통이었는데 김춘기 어르신은 어떤 금속이 들어가는 방식의 신기술을 배웠고, 라디오를 직접 만들 수 있었다. 그는 “당시 진공관이 들어가는 라디오가 주류였는데, 내가 배울 때는 석이라는 금속을 넣어서 스피커를 만드는 라디오였다”며 “고향에 돌아와서는 라디오를 만들어서 지역에 전파하기도 했지”라고 전했다.
학원 과정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그는 직접 라디오를 만들어서 주변에 판매하기도 하며 신문물을 지역에 보급하는 사람이 됐다.
비록 어린 시절 자신의 바람과 달리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 수밖에 없었지만, 새로운 기계를 사고, 다루는 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특히 사진과 영상 촬영을 특히 꾸준히 했고, 컴퓨터는 자녀들에게 모르는 것을 물어가며 스스로 익혔다.
김춘기 어르신의 방에는 자신의 일과표부터 시기에 맞춰서 해야 할 일, TV 채널별 프로그램, 작목별 농사 관련 파일 등 그의 일상에 관한 모든 것이 잘 정리돼 있다. 특히 자신만의 분류법을 만들어 정리해둔 물건과 자료들이 그의 성정과 습관을 잘 보여준다.

방에 걸려있는 김춘기 어르신의 젊었을 적 사진들
방에 걸려있는 김춘기 어르신의 젊었을 적 사진들

아쉽게 사진 자료의 원본은 모두 없애버렸지만, 그가 비디오카메라를 활용해 모든 사진을 촬영했고, 지금은 파일로 남아 잘 정리돼 있다.
1980년대 그의 큰아들이 사줬다는 비디오카메라로 남겨둔 마을과 사람들의 모습은 정말 특별하고, 흥미로운 자료들이다. 어깨에 메고 다녀야 할 정도로 큰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시골 마을을 촬영하던 그의 모습은 어땠을지, 또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이웃들의 표정은 어땠을지 궁금하다.
대학생들이 마을에 농활을 왔을 때, 백중 날 모정 앞에 큰 솥을 걸고 돼지를 잡아 삶던 모습들이 영상으로 남아있다. 당시엔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지금은 볼 수 없는 그 시절 시골 마을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뒀다. 
김춘기 어르신은 본인의 학교 졸업사진부터 자녀들의 성장기까지 모든 사진과 영상도 갖고 모두 있다.
영상을 촬영하고, 갈무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인과 가족의 사진도 많이 찍어뒀다. 다른 동년배에 비교해 훨씬 많은 사진을 가진 그는 “내 평생을 남겨놓고 추억하고 싶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열심히 찍기도 하고, 남에게 부탁해 사진을 많이 남겼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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