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를 지어보면 가을엔 먹을거리가 풍성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산에, 들에 먹을 게 넘치다 보니 오래 두고 먹기 위해 손질하여 말리고 절이는 등 먹거리를 갈무리할 일이 많다. 어쩌면 한가위가 냉장고가 없던 농경사회에서 넘치는 먹거리를 처치하기 위해 만든 날이 아닐까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아니면 조상님께 올리는 연말 보고회일 수도 있고, 하늘과 땅에 고마움을 전하기 위한 의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국에 있는 수많은 며느리가 명절만 다가오면 우울해지고, 명절 전후로 이혼율이 높다는 통계를 볼 때면 무언가 잘못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명절 문화가 가족들이 모여 풍성함을 나누던 원래의 취지와 멀어졌기 때문이거나,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는데 제도와 문화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도토리 팽이 꾸미기    
도토리 팽이 꾸미기    
이쑤시개와 도토리로 만든 도토리팽이 
이쑤시개와 도토리로 만든 도토리팽이 

다시 숲으로 돌아와서, 숲도 가을이 되면 먹거리가 풍성해진다. 대표적인 열매가 도토리와 솔방울이다. 도토리나무 밑에 5분만 서 있으면 도토리가 똑- 똑-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 9월엔 유아숲체험원에서 도토리를 주제로 수업하고 있다. 
수업은 늘 ‘꿈꾸는 도토리’라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엄마 가지 끝에 올망졸망 매달린 도토리들에게 엄마 나무가 말해요. 얘들아, 가을이 되면 이제 엄마 품에서 떨어져 멀리멀리 데굴데굴 굴러가서 엄마처럼 커다란 나무가 돼야 한단다.”
“싫어요. 싫어요. 저흰 지금처럼 엄마 곁에 꼭 붙어 있을 거예요.”
이쯤 되면 아이들 표정이 심각해진다. 
아이들은 “선생님 아기 도토리가 엄마 나무랑 안 떨어지면 좋겠어요.” “전에 우리 엄마 아빤 둘이 싸워서 나만 두고 집을 나갔어요.” 라며 마음속 이야기를 내뱉는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 나무는 굳건하게 말한다.
“얘들아 땅 위에는 너희들을 먹이로 노리는 동물들이 많으니 조심해야 한단다. 가을이 되고 도토리가 여물어 톡-톡- 도토리가 하나둘 떨어지자, 청설모가 도토리 하나를 물고 나무 위로 쪼로록~, 어치가 두 번째 도토리 하나를 물고 하늘로 푸드득~, 멧돼지가 땅에 코를 박고 ‘킁킁’하며 세 번째 도토리를 꿀꺽! 지팡이로 낙엽 위를 헤치던 할머니가 네 번째 도토리 하나를 주워 봉지 속으로 쏙~, 그리고 마지막 도토리 하나는 좋은 흙과 따뜻한 해를 만나 잠이 들어 꿈을 꾸었어요. 엄마 나무처럼 커다란 나무로 자라는 꿈을요.”
이야기가 끝나면 아이들에게 내 뒤에 있는 도토리나무를 보여준다. 그리고 제 키보다 훨씬 큰 나무를 올려다보며 아기 도토리가 엄마 나무처럼 크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이야기를 나눈다. 김치, 시금치부터 당근과 도토리 죽까지 각자가 알고 있는 음식이 다 나온다. 신기한 건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보단, 건강에 좋은 음식을 알고 있고 그 음식에 대해서 말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치킨이나 햄버거, 피자를 줘야 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다음엔 도토리를 주워보고 만져보고 팽이도 만들어 보고, 도토리를 먹이로 삼는 동물이 그려진 보자기 위에 도토리를 올려놓고, 다 같이 보자기를 잡고 도토리를 이리저리 옮겨보는 놀이도 해본다. 어떤 친구들은 도토리엔 영 관심이 없고 한쪽에서 송충이가 움직이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기도 한다. 유아 숲 지도자로서 아이들을 위해 주제를 정하고 수업을 준비하지만, 수업을 위한 수업이 되지 않도록 아이들이 그때그때 관심 두는 것들도 존중해준다.
독자들에게 아이들과 집에서 가을에 할 수 있는 간단한 놀이 한 가지를 알려주고 싶다. 바로 도토리 팽이다. 준비물은 도토리, 이쑤시개 그리고 송곳이다. 송곳으로 도토리 윗부분을 살짝 뚫어서 이쑤시개를 꽂으면 끝이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잘생긴 도토리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왠지 흐뭇하다. 숲에 와서 아이들과 도토리를 찾아서 주워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나도 요즘 시간 날 때마다 수업에 쓸 도토리를 주우러 다닌다. 그런데 도토리를 주울 때면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이, 내 몸속 어딘가에 수렵채집을 했던 인류의 DNA가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가을철 대표 숲의 먹거리 두 번째는 솔방울이다. 서림공원의 솔방울을 이야기하자면 빼먹을 수 없는 동물이 청설모다. 요즘 이곳에선 솔방울을 까먹기 위해 돌아다니는 청설모를 가까이에서 자주 볼 수 있다. 보통은 사람한테 가깝게 오지 않는데 솔방울 앞에선 사람도 잘 뵈지 않는가 보다. 하루는 청설모가 솔방울 하나를 물고 어깨동무한 나뭇가지들을 날래게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모습을 보고 짝에게 선물을 주러 가는 걸까 하는 상상도 했다. 청설모는 도토리보다 솔방울을 더 좋아한다. 생각해보면 솔방울보다 도토리가 훨씬 품도 덜 들고 먹을 것도 많은데 굳이 솔방울을 먹는 이유가 무엇일까. 

왼쪽부터 솔방울, 솔방울 씨, 솔방울 껍질
왼쪽부터 솔방울, 솔방울 씨, 솔방울 껍질
설모가 솔방울을 까먹은 흔적
설모가 솔방울을 까먹은 흔적

이럴 땐 먹어봐야 한다. 솔방울 씨앗은 잣과 비슷한 맛이고, 도토리는 떫은 밤 맛이다. 내가 청설모라도 솔방울 씨부터 먹을 것 같다. 더군다나 청설모는 솔방울을 까기에 특화된 신체 구조로 되어 있다. 청설모가 솔방울 먹는 영상을 찾아보면 솔방울 껍질을 하나하나 돌려 깎는 모습이 마치 기계처럼 빠르고 일정하다. 
그래서 지금 서림공원엔 청설모가 솔방울을 먹고 남긴 흔적들이 많다. 솔방울 껍질과 심지 부분인데 숲 놀이 중 한 아이가 청설모가 먹고 버린 솔방울 열매를 보고 ‘닭 다리 치킨’ 같다고 하길래 그다음부턴 닭 다리 치킨이라 부르기로 했다. 새우튀김 같기도 하고. 이렇게 숲에 오는 친구들이 숲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라워하고 또 그 기쁨을 함께 누리는 재미를 알아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서림공원에서 사람을 기다린다. 

꽃무릇
꽃무릇

지난주 금요일 서림공원에 첫 꽃무릇꽃이 폈다. 고창 선운사 꽃무릇은 이번 주말에 만개할 거라고 한다. 지난주에 아들, 손주와 꽃무릇을 보러 선운사에 갔다가 봉우리만 보고 온 서림공원 단골 산책객이 준 따끈따끈한 정보다. 그런데 하나 주의할 점이 있다. 꽃은 만개할 테지만 입구부터 사람이 많아서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이번 주말에도 서림공원에 산책 올 것을 권한다. 선운사만큼은 아니지만 여기저기 꽃무릇이 피었고 땅에 떨어져 있는 닭 다리 치킨과 새우튀김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전푸르나 / 유아숲 지도사
전푸르나 / 유아숲 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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