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처지에 학교조차 갈 수 없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붓글씨로 쓴 니은 자에 빠져 평생 독학으로 꾸준히 서예에 정진해온 이가 있다. 평생 농사일을 하며 틈틈이 서예를 해왔고, 전국 각지의 서예대전에도 참여해 수많은 수상을 할만큼 대단한 열정과 실력을 가진 서예가 김충(81) 씨다. 
상서면 회시마을의 평범한 농가에서 만난 김충 씨는 켜켜이 쌓인 상장과 임명장을 내보이며 자신의 이력을 소개했다.
누구나 어려웠던 시절이라지만, 김충 씨의 집은 유독 형편이 어려웠고 그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어깨너머로 한글을 깨우쳐야 했다. 어린 나이에 자신이 가지 못하는 학교를 매일 다니는 또래를 보며 정말 부러워만 하는 처지였다. 김충 씨는 “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을 보며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사촌동생이 학교 서예 시간에 배워 써온 붓글씨를 봤고, 유독 니은 자가 눈에 들어와 마음에 남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서예에 대한 그의 사랑이 시작됐다.
서예의 매력에 흠뻑 빠졌지만, 그렇다고 누가 벼루와 붓, 종이를 사주는 행운은 없었다. 종이라고는 신문지조차 귀하던 시절, 서예에 필요한 종이를 직접 구해야만 했다. 공사를 하고 남은 시멘트 포대의 종이를 뜯어 깨끗한 면에 붓글씨를 써 내려갔다. 
누구에게 단 한 자의 배움도 구하지 못했던 그는 이철경의 ‘한글서예’ 교본을 스승으로 삼아 서예를 익혔다. 그런 탓에 한자보다는 한글서예가 훨씬 익숙하며, 궁체로 한글을 평생 써왔다.
김충 씨가 가장 좋아하는 글은 ‘부모은중경’이다.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설명하는 불교 경전인데, 그의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이야기를 붓으로 옮겨 적은 셈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여러 번 부모은중경을 썼고, 병풍으로 만들어진 것도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다.

김충 씨의 작품 '농가월령가'. 농업기술센터 3층에 전시돼 있다.
김충 씨의 작품 '농가월령가'. 농업기술센터 3층에 전시돼 있다.

 

부모은중경을 좋아하고, 많이 썼던 배경은 김충 씨의 평소 신조와 관계가 있다. 넉넉하지 않은 삶이었지만 그는 늘 ‘베풀고, 손해보고, 양보하고, 피해주지 않으며 좋은 말만 하면서 살아가기’를 노력해왔다. 그런 그였기에 지인을 비롯해 자신의 글을 좋아해 주는 이들에겐 아낌없이 작품들을 선물했고, 지금 그의 집에는 변변한 족자 하나 제대로 남은 것이 없다. 김충 씨가 쓴 ‘농가월령가’를 보고 김종규 군수가 기부를 요청했고, 그 작품은 지금도 농업기술센터 3층에 전시돼 있다. 그 밖에 여러 작품이 부안김씨 대종회 기록물보관실에 가있다.
평생 농사일을 해오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서예에 매진했다.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기 위한 기부활동도 꾸준히 해왔다. 지역인재를 위한 근농재단에 매달 3만원 씩 꾸준히 후원 중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그의 부모님은 일하러 일본에서 거주하고 있었고, 김충 씨와 그의 쌍둥이 형 김협 씨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해방 이후 4살 무렵 지금 그가 사는 상서면 회시마을로 돌아와 성장했다.
서예의 매력에 빠져 교본에 의지해 자력으로 익혔던 그의 솜씨를 인정받고,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열일곱 살 무렵이다. 
우연히 그의 작품을 보게 된 전주 문화일보의 어느 기자가 신문에 글을 써서 내달라고 요쳥했고, 그렇게 그의 작품이 신문에 실렸다.
이후 기회가 닿을 때마다 대회에 출전했고, 작가협회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지역의 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다양한 수상경력이나 지금껏 받았던 상장을 모으면 경운기 짐칸 하나는 넘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국내 서예대전은 모두 쫓아다니며 가장 낮은 상인 입선부터 대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상을 했다. 1999년부터는 한양미술작가협회 부안 지부장으로 맡아 활동했다.
젊은 시절 생업에 필요한 시간 외엔 오로지 서예에 매진하며 전국을 쏘다니며 대회에도 참가했던 그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집에서 홀로 서예를 하고 있지만, 활동이나 대회 참가는 10여 년 전을 끝으로 더는 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고, 갈수록 여건이 맞지 않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가 평생 써온 궁체를 요즘은 다들 잘 쓰지 않고, 이를테면 유행이 지난 것 같다”고 고백했다.
얼마 전 쌍둥이 형을 먼저 하늘로 떠나보내고는 고민이 깊어졌다. 그가 죽고 나면 자신의 작품이 어디서 어떻게 남아있게 될지 걱정이었다. 자녀들에게 물어봤지만, 그들의 당대에는 보관할 수 있겠으나 그 자식들에게 대를 이어 또 물려주고 보관하게 할 자신은 없다는 솔직한 답을 들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거나 도움받지 못했지만, 묵묵히 서예를 익히고 지역에서 꾸준히 활동을 해 온 서예가의 고민이 안타깝다. 김충 씨 외에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귀중한 노력과 작품의 가치를 인정해 소중하게 보관하고, 자랑하는 지역의 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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