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변산면 유동마을 원두막
1990년대 초 변산면 유동마을 원두막

여름철 농촌에서는 군풋할 때 군입정을 무엇으로 했을까? 예전에는 참외나 수박 정도가 아니었을까. 이 과일을 먹으려면 원두막에 찾아가서 보자기에 싸간 통보리를 내놓고 수박이나 참외로 바꿔 먹었다. 쌀이나 보리가 현금처럼 통용되던 1960년대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동네의 말 만한 처녀 총각들이 달밤에 외똔집 됭곗(돈계)양반 원두막에 가서 추렴으로 수박을 먹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수박 빨리 먹기 내기를 했다는데, ‘김’이 수박의 양 끄트머리를 잡아서 입으로 한번 훑으면 수박씨가 오른쪽 입가에서 신통하게 떨어졌다는 얘기도 들었다. 동네 사람들은 ‘김’의 먹는 모습을 보고 ‘하모니카를 분다’고 놀리기도 했다.

작물이 자라는 계절에 농촌에서는 서리(扫利)가 심했다. 과일을 돈 주고 사 먹기는 어렵고 배도 고프니 아이들은 주인 몰래 따 먹는 수박 서리, 참외 서리 등의 짓궂은 장난을 쳤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일탈을 묵인해주기도 했지만 깐깐한 주인을 만나면 피해보상이란 이름으로 동네가 한바탕 몸살을 했다. 서리의 대상은 밀·보리·콩·감자·고구마·옥수수·단쑤시·참외·수박·감·살구 등 많기도 하다. ‘육칠월에는 외서리, 칠팔월에는 콩서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농촌에서 흔한 것이 서리였고 밀·콩·보리 서리는 주로 낮에 하지만 다른 것은 밤에 이루어졌다.

보리나 밀의 추수가 끝나면 농촌 사람들은 그 자리에 참외와 수박을 심고 밭머리나 밭 한가운데에 원두막을 지었다. 여기서 원두(園頭)라는 말은 참외, 오이, 수박, 호박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원두밭에 짓는 원두막(園頭幕)은 농부들이 쉬는 곳이며, 과일을 사러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장소이고 작물에 사람 손이 타지 않도록 감시하는 밭 주인의 생활공간이었다. 원두막이란 기둥 네 개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 벼나 보릿짚이나 밀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만들고, 그 밑에 통나무나 판자를 얹어 사람들이 앉도록 하고 땅에는 사다리를 놓아 누각처럼 오르내렸다.

참외나 수박 농사와 관련한 속담들이 여럿이다. ‘수박은 살구꽃 필 때 심는다.’는 것은 늦서리의 피해가 없는 4월 중순 살구꽃이 필 무렵에 수박 심는 것이 적기(適期)라는 뜻이다. ‘중복 전 참외요, 말복 전 수박이다.’고 했으니 참외는 중복(7월중순경, 올해는 7월 21일) 이전의 것이 맛도 좋고 생산량도 많으며, 수박은 이보다 10~20일 늦은 말복(올해는 8월 10일) 이전의 것이 맛뿐만 아니라 생산량도 많다는 뜻이다. 이런 속담과 결을 달리하는 속담도 있으니 ‘원두한이 사촌을 모른다.’는 것이다. 원두한(園頭干)은 원두막에서 참외나 수박을 파는 사람을 낮춰 부르는 말인데, 그는 사촌이 과일을 사러 와도 우수를 주지 않고 싸게 팔지도 않는 인정머리 없는 장사치라는 것이다. 농촌에서는 서로 나눠 먹는 전통이 있었지만, 농작물을 통해 돈을 벌려는 원두한 같은 사람은 어느덧 사촌도 몰라보는 장사꾼이 되었다.

부안에는 ‘외첨지 삼년하면 귀 먹는다.’는 속담이 전한다. 외첨지가 외막 지어 놓고 참외를 파는데 얻어먹으려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귀를 막고 모르쇠로 장사를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첨지(僉知)는 조선 시대 관직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의 준말이기도 하고 나이 많은 남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현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의 인력거꾼 김 첨지나 꼭두각시놀음의 주인공 박 첨지처럼, 지위 없는 사람을 허물없이 부르는 이름이 첨지다. 부안의 외첨지는 돈이 될 만한 것을 찾다가 참외 농사를 하게 되었다. 처음 하는 일이라 실패도 많았고 까락까락치면 돈도 솔찬히 들어갔다. 그런데 과일을 사 먹는 사람들을 보니 가까운 친척들이거나 어렸을 때부터 함께한 낯익은 사람들 아닌가. 외첨지는 눈을 질끈 감고 독한 마음으로 외장사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그를 ‘외첨지’라 낮춰 불렀고, ‘귀 먹었다’거나 ‘도치기’라는 험담에도 흔들리지 않고 장사를 계속했다. 그가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외첨지 삼년하면 귀 먹는다.’는 속담 하나를 부안 사회에 남겼다.

정재철 / (사)부안이야기 이사
정재철 / (사)부안이야기 이사

이제 부안에서는 추억 같은 원두막을 찾기 어렵다. 농부들이 수박이나 참외 농사를 지어도 판매를 도매상들에게 맡기니 밭에다 원두막을 짓지는 않는다. 요즘 농사는 비닐하우스를 짓고 그 안에서 과일 농사를 할 수 있으니 원두막과는 거리가 더욱 멀어졌다. 여름철이 끝나면서 참외나 수박 등 여름 과일도 끝물이다. 여름 장마에 과일들이 단맛을 잃어가자 소슬한 가을이 바람처럼 문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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