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에 제작된 부안지도[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빨간동그라미 친 곳이 남문이다. 부안읍성은 본래 남문과 함께 동문과 서문이 있었는데, 이 지도에서는 남문만 표시되어 있다.

1894년 12월,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주요 지도자 전봉준․손화중․김개남․김덕명․최경선 등이 차례로 붙잡힘으로써 동학농민군은 단일 대오를 꾸리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 저항하였다. 이후 일본군이 주도한 동학농민군 토벌작전은 동학농민군을 호남의 해안지역으로 내몰아 섬멸(殲滅)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 일본군이 부안에 들어와 구체적으로 어떠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처음 부안에 들어온 일본군이 부안을 떠난 것은 1894년 12월 25일(음력)이었고, 그 뒤 다시 부안에 들린 후 1895년 1월 18일에 김제 만경(萬頃)으로 갔다. 그러나 초토사(招討使) 민종렬(閔鍾烈)이 1895년 1월에 작성한 「전라도 각 읍에서 노획한 동도의 수효와 장령의 성명을 적은 성책」에, “부안 거괴(巨魁) 손순서(孫順西)․손양숙(孫良淑)․배홍렬(裵洪烈)을 갑오년(甲午年) 12월 25일에 붙잡았는데, 일본군이 압송하여 갔다.”는 기록으로 보아, 부안에 들어 온 일본군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철수한 것은 아니었다. 이때 붙잡힌 이들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는다.
위의 기록에는 같은 달 29일 정부군이 노대규(盧大圭)와 노입문(盧入文)은 쏘아 죽이고 늦게 보고하였다는 내용도 함께 전한다. 이들의 처형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후 부안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동학농민군 처형이었다. 이들의 신상은 물론 동학농민군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정부의 공식문건에 기록되어 전한다.
이와 함께 부안에서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체포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즉 “송운백이 와서 함께 향교 유회소(儒會所)의 향사대회(鄕士大會)에 갔다. 동학 거괴(巨魁) 7인, 백사준․김도삼․이상용․손수일․김석윤․곽덕언․신명언 등을 체포하지 못하였는데, 소모영(召募營)에서 관칙이 도착하였다. 관가에서 나와 향교에서 모의하기를 향중 유생 20인을 별유사(別有司)로 차정하여 거괴와 옛 동학을 체포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즉 관군이 아닌 유생을 별유사로 선발하여 동학농민군을 체포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앞에 언급한 곽덕언과 함께 또 다른 거괴 송성구(宋成九)가 체포당하였다. 
이처럼 유생으로 구성된 별유사들이 활동하면서 주산면 홍해 마을에서도 동학농민군 체포가 있었다. 즉 “본 면 별유사 송윤두(宋潤斗)․김규용(金奎鏞)․김진용(金鎭庸)이 왔다. 우리 동네에 사는 옛 동학 박문표(朴文表)를 붙잡아 갔고, 도산에 사는 김봉보(金奉甫)와 이화일(李化一)을 붙잡아 갔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동학농민군 체포는 관군과 함께 지역에 거주하는 유생, 즉 기득권 세력이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줄포 도소 설치와 운영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신소능과 고부봉기 때 삼장두(三將頭) 중의 한 명으로 활약한 김도삼과 이름이 같은 김도삼(金道三)이 체포당하는 등 부안 동학농민군의 주요 지도자들이 관군과 유생으로 구성된 별유사에게 붙잡혔다. 이와 함께 전라 감영에서는 동학농민군 체포를 독려하였다. “감영에서 보낸 감결에, 전부터 [동학에] 동의한 무리이거나 탁란(濁亂)과 작폐(作弊)에 새롭게 가담한 자는 일일이 체포하라고 한다.”고 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이들과 그럴 가능성이 있는 이들을 색출하여 처벌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부안에서 일어난 두 번째 동학농민군 처형은 1895년 1월 12일에 일어났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박문표․김봉보․송성구 등을 오전 9시~11시에 부안읍의 남문 밖에서 총살한 것이다. 이들이 왜 처형을 당하였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노대규와 노입문을 총살시킨 사실을 기록한 「전라도각읍소획동도수효급장령성명병록성책(全羅道各邑所獲東徒數爻及將領姓名竝錄成冊)」

부안에서 두 번째 처형이 있는 뒤, 부안 현감은 “본 현에서 잡아 가둔 난적(亂賊)의 괴수 등 재소자와 옮겨 가둔 자와 물고한 자를 일일이 그 죄목을 갖추어 장부를 작성해 올리고 처분을 기다립니다. 이와 같이 첩정하오니, 삼가 청하옵건대 살펴서 시행하옵소서. 첩정한 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라며 전주에 주둔하고 있는 양호순무좌선봉진(兩湖巡撫左先鋒陳)에 보냈다.
이에 대해서 양호순무좌선봉진은 “작성된 장부는 올라왔거니와, 이미 조처한 자는 다시 거론할 필요 없고, 갇혀 있는 네 놈은 읍내의 여론에 따라 처치하고 보고해 올 것이며, 전에 발송한 감결에 의하여 각별히 신칙하도록 할 것.”을 지시하였다. 주목되는 점은 이미 붙잡은 4명에 대해서 읍내의 여론에 따라 처치한 후 보고하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 당시 붙잡힌 동학농민군은 대체적으로 학살과 다름없는 처벌을 당하였다.
이와 달리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였다가 귀화장(歸化狀)을 쓰고 전향한 이들에 관한 처분 기록도 전한다. “본읍 소산면(所山面) 와상리(瓦上里)에 사는 사과(司果) 남궁백(南宮柏)과 사인(士人) 송경수(宋敬守) 두 사람은 본디 분수를 지키며 사는 사람인데, 강제로 동학도에 들어갔으나 처음부터 불법을 자행하는 일이 없었고, 즉시 귀화하였다. 그 혐의로 인하여 무함 속에 들어갔으니, 비록 의구심이 가기는 하지만, 일이 매우 억울할 뿐만 아니라, 또 본진의 군무(軍務)로 신칙(申飭)할 일이 있으니, 즉시 그 사람들을 보내도록 할 것.”이라고 하여 관대하게 처분하였다.

박대길

부안군청/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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