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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동학농민혁명사 19> 백산에서 황토현으로 ③
  •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 승인 2019.12.06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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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를 통해 본 동학농민혁명 초기 전개과정

2019년 2월, 국무회의에서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로 황토현전승일을 정하였다. 125년 전, 집권세력이 반란과 역적으로 낙인찍었던 역사적 사실이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이다. 이에 앞서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 선정위원회」는 기념일 선정을 위한 3가지 기준을 정하였다. 역사성과 상징성, 그리고 지역참여도였다. 논란의 소지를 만들어 논 지역참여도를 제외하고, 역사성과 상징성만을 놓고 볼 때,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은 당연히 백산대회가 되어야 한다는 데에 필자는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더불어 황토현전승일의 미흡한 부분을 채워 줄 역사적 사건이 바로 백산대회라고 확신한다.
어쨌든,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로 황토현전승일이 정해졌고, 향후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변경되지 않는다고 볼 때, 황토현전승일이라는 단일 사건이 아니라 전체 과정에서 일어난 개별 사건들이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고 채워주는 역할이 중요하다.
동학농민혁명 초기 전개과정, 즉 사발통문거사계획과 고부봉기, 무장기포와 백산대회, 그리고 황토현전승과 황룡전승을 거치면서 완성된 전주성 점령은 동학농민혁명에서 가장 큰 승리였고, 동학농민군이 추구하는 이상사회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과정이었다. 따라서 초기 전개과정에서 일어난 개별사건은 모두 앞뒤로 연속성을 가지며,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황토현전적지에 건립된 갑오동학혁명기념탑

역사 해석에서 가정법은 무의미한 것이지만, 동학농민혁명 법정기념일로 정해진 황토현전승을 가능하게 한 직접적인 과정과 배경은 백산대회였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겠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 일본과 서양세력의 침탈과 침략을 막아내겠다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명백히 밝히면서 혁명군을 조직하고 강령과 군율을 선포한 백산대회가 없었다면, 당연하게도 황토현전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발통문거사계획부터 황토현전승까지 개별사건은 앞뒤를 연결하는 연속적으로 일어난 필연적인 사건들이었다.

황토현전적지에 조성된 동학농민혁명기념관(교육관) 전경

1894년 3월 26일(양 5월 1일), 백산대회 이후 혁명군은 전주로 나아가 전라 감영을 점령하고, 사발통문거사계획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서울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전라 감영에서 진압군을 파견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에 맞설 준비를 하게 된다. 혁명군이 전주를 향하는 척 하면서 취한 군사행위의 하나가 부안현 점령이었다.
적어도 4월초 경에 부안현을 점령하고 부안 현감을 사로잡았으며, 전투 상황에 대비하여 군수품(軍需品)을 마련하였다. 즉 “부안현감이 저들에게 곤욕을 당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며, 공형 또한 저들에게 주리를 틀리고 매우 맞아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있습니다. 주둔한 저들 무리는 군기(軍器)를 빼앗아, 그날 진시(辰時) 무렵에 남쪽대로를 향하여 갔으며, 그들이 간 것은 아마도 고부군으로 향하는 길을 택한 것 같습니다.”라는 부안현의 보고를 통해, 군기의 확보와 진압군에 맞서기 위해서 고부로 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때의 상황을 홍해마을에 살던 기행현은 『홍재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동학군 1만여 명이 갑자기 성에 들어왔다. 일시에 성이 함락당하고 관원은 도피하였으며, (중략) 그 때 동헌의 곤란한 상황은 형용하기 어려웠다. 저녁 무렵 향교에 들어갔는데, 상재와 하재(上下齋) 모두 한 사람도 없어 적막하였다. 돌아와 성중을 바라보니 화광이 충천하고 총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부안 관아를 점령한 혁명군은 동헌 바로 뒤에 있는 상소산(성황산)에 진을 쳤다. 
성황산에 진을 친 혁명군의 움직임은 다음과 같았다. “동도(東徒)가 부안의 동헌에서 본 읍 뒤의 성황산(城隍山)에 옮겨 주둔하였는데, 5개 읍에서 온 자가 모두 수만 명이었다. (중략) 그래서 지금 발 빠른 심부름꾼[走足]이 탐문해 온 것을 보니, 잠시 영군(營軍)을 피하려는 것 같았다.”고 한다. 전라 감영에서 파견한 진압군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부안현을 점령한 혁명군은 4월 6일 아침 부안을 떠나 고부의 도교산(道橋山)로 향하였는데, 이때의 광경을 “동학군이 출정하는 것을 가서 봤다. 진세는 극히 엄정하였다. 5세 아이와 14세 아이가 괴수(魁首)라고 하였다. 다시 도소봉에 올라가 사거리에서 외요촌으로 향하는 모습을 봤다. 중교를 넘어 고부에 이르러 (중략) 백산에 있던 전라 감영군이 곧바로 고부로 갔다.”고 기행현은 기록하였다. 한편 전라 감영에서는 병정과 별초군(別抄軍)․보부상(褓負商) 등을 도교산으로 파견하였다. 혁명군과 전라 감영군은 황토산(黃土山)에서 맞닥뜨려 오후 4시경부터 접전이 시작되었다.
백산에서 출발한 혁명군과 전라 감영군이 치른 전투는 1894년 4월 6일(양 5. 10) 저녁 무렵에 시작되어 다음 날 7일 새벽 4시경에 혁명군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이 승리를 계기로 혁명군은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황토현전승은 혁명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처럼 부안에 집결했던 혁명군이 황토현전투의 주력군이었다.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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