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만난 양규태 선생 (오른쪽 다리를 다쳐 기브스를 했다) ⓒ장정숙

“선비의 뼈에 예술의 멋”

내공 또 내공

딩댕동. 한참 뒤에야 아파트 현관문이 비스듬히 열리더니 목발 짚은 백발의 노인이 허리 굽혀 내 손을 잡으려 다가온다. 나는 황급하게 복도에 서서 천천히 말했다.
“아무리 급해도 서둘지 마세요. 또 자빠져요. 가마니 거기 서 계세요.”손을 잡기 전에 가볍게 상대를 밀어 내듯이 말하자 내 뜻을 짐작 했는지 빙그레 웃었다. “내 집에 온 손님인데 버선발로 나와야지요.”그렇다 치자. 하지만 팔순이 지난 나이, 노인 아닌가. 거기에다 얼마 전 아파트 현관 앞 계단을 내려가다 다리 헛디뎌 오른쪽 무릎이 다쳐 몇 달째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 아닌가.
부엌인지 서재인지 응접실인지 모를 좁은 방에 조그만 책상 하나. 무릎 위에서 발목까지 바른 기브스를 초록 붕대로 칭칭 감고 있다.
- 사모님은 ?
“가까운 병원 들린다고 조금 전에 나갔어요. 이거 차 한 잔도 대접 못하고…”
차라리 잘 됐다 싶다. 한 시간쯤 인터뷰할 수 있겠느냐 했더니 “이 몰골로 멀 하겠어요. 하면서도 “입은 괜찮으니까요.”다.

문화설계사

- 며칠 전 추담 홍정택 선생 석비 제막에 다녀왔는데 거기서도 양 선생 이야기 많이 합디다. 추담이라는 호가 판소리 하는 분 호로서는 딱 맞는 듯해요, 호는 누가 지어 주었는지…
“제가 알기로는 시조 대가 석암 정경태 선생이 지어주신 것으로 압니다만…”
한 분은 판소리 ‘수궁가’명인이오, 다른 한분은 우리나라 시조를 중흥시킨 사람이다. 부안이 낳은 이 방면의 세계적 인물이다. 한국에서 최고면 세계 최고일 수밖에 없다. 판소리나 시조나 일본 사람이나 중국 사람이 흉내도 내기 어렵다. 무슨 무슨 오페라로 팬들을 열광시키는 세계적인 쏘푸라노나 테너도 장르가 달라지면 아예 먹통이다. 이런 소리꾼이 우리 부안 주산의 뉘영매와 부안읍 신흥리에서 태어난 것을 사람들이 알기나 할까. 서양 음악만 음악인가, 한국 음악도 음악이다.
양규태 선생은 딱 꼬집어서 부칠 간판을 무어라고 달아야 할지 필자의 재주로는 가늠하기 어렵다. 문화예술의 치마폭이 워낙 넓은 데다 식견 또한 대단하다. 그는 부안 땅의 역사와 문화 예술을 캐내고 들어내 자랑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였다. 부안 군청 말단 공무원에서 군수 다음의 최고위직까지 월급 받고 일한 전반 30년은 물론 월급 없이 동분서주한 후반 근 30년은 더욱 알졌다. 20여권의 책을 썼고 10여 가지 문화 예술 관계 책임을 맡았다.
그의 머리 위에 얹힌 감투로는 그의 업적을 설명하기 어렵다.
수필가다, 작가다, 루포라이터다, 문사다 하는 건 그의 얼굴에 부칠 간판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굳이 필자가 부친다면 문화설계자, 문화 창조자, 문화 공방의 장인, 사람 냄새 나는 인간 문화의 건설 일꾼 같은 느낌이 든다.
- 사람들은 선생님 호칭을 뭐라고 부릅니까?
“드리없어요. 과장, 회장, 선생님, 드리 없어요. 상대방과 접촉한 인연 따라 호칭이 달라지는 모양이지요. ‘자네’라고 부르는 선배들이 요 몇 년 사이 많이 가셨어요. 참 아쉬워요.”
주인공은 평생을 ‘부안’을 떠나 살아 본 일 없고 ‘부안’이나 ‘변산’과 관계되지 않은 일을 한일이 없다. 다만 한 가지 그가  태어난 곳은 부안이 아니라 순창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는 부모님을 따라 회문산이 있는 순창군 적성면 지북리에서 부안읍 모산리로 이사왔다. 적성은 양씨들의 세거지요, 살림도 탄탄했다. 할아버지 양병익(楊秉益)은  명망 있는 한학자였다. 국군은 북으로, 북으로 진격하는데 순창 회문산 일대는 여전히 인공치하였다. 할아버지는 아들 의섭(양규태의 부친), 만두, 만정, 민성 등 세 숙부들을 거느리고 부랴부랴 부안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부안에는 다행히 그의 당숙 양만기가 읍내 동중리 시장가에서 신문지국과 통운 대리점으로 안정된 살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순창 산골짜기 소년은 부안초등을 거쳐 부안중학교와 부안농고에서 어린 날의 꿈을 키웠다. 중학교 10회, 농고 6회다.

보기 드문 대가족. 직계 자손만 열셋이다.

1964년 공채 1호

그는 스타트 라인부터 주목을 받았다. 1962년 군대 복무를 마치고 부안 집에 돌아 온지 얼마 뒤 1964년 전북도청에서 지방 공무원 공채 시험이 있었다. 제1회다. 양규태는 이 시험에 합격 부안읍 사무소 서기보에서 시작 68년 군청 내무과 공보계를 거쳐 내무과 행정계에서 지방 행정을 높은데서 바라보는 안목을 갖게 된다. 그 무렵만 하더라도 공보계는 주민을 위한 공보라기보다는 읍면이나 도청을 위한 군청의 홍보기능이 고작이었다. 이런 제한 속에서도 그는 틈만 나면 부안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고 황무지 개척에 나섰다. 행정계장-내무과장-기획 감사실장 등 동료 직원들이 부러워하는 엘리트 코스를 거쳐 지방부이사관으로서 명예 퇴직할 때까지 (1964~1999년) 35년 동안 ‘일에 미쳐서’ 밤인지 낮인지를 몰랐다. 그가 부안군청과 부안의 문화 예술단체에서 일하던 57년 동안 그는 38명의 군수를 모셨다.
군수를 임명 할 때나 선거할 때나 관료사회의 풍파는 거센 법, 그는 한 번도 징계를 받기는커녕 구설수에 오른 일이 없었다니 공직자로서의 능력이나 성실성만 가지고는 선뜻 수긍하기 어렵다. 타고 난 복이 아니고서는……
- 공무원 퇴직 후 어떤 책임을 맡게 됐습니까?
“예총지부장이었어요. 군청에서도 권하고 저도 하고 싶었던 자리였어요. 그런데 사실 애로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요, 부안은 먹고 살기가 좋은 곳이어서 사실 문화다 예술이다 이런데  관심이 없거나 어쩌면 천시 했거든요. 거기에다 문헌도 시원치 않고 물어 볼만한 사람도 드물고… 자전거 타고 30~40리가기 예사고 심지어 걸어가야 할 곳은 10리고, 20리고 걸어갔어요.”
5년, 10년만 관물을 먹어도 '에헴!`하고 티를 내는 게 공직자라는데 35년 화려한 관가를 달려온 사람이 퇴직하고서도 뭐가 좋아서 그토록 향토 문화에 미쳤을까 싶다.
“정말 미쳤던 것 같아요. 호기심이랄까 학구열이랄까, 그런 거겠지요. 문헌이나 자료가 없거나 미비하면 내가라도 만든다, 이런 자세였으니까요. 우선 예총의 틀부터 만들었어요. 예술 문화 단체 5개가 있어야 군이나 도의 지원을 받게 되는데 우리 부안 예총은 3개 단체 밖에 없었어요. 그래 우선 내가 관계하던 문인협회와 예술협회를 끌어다 5개를 만들었어요. 전주, 군산, 이리 같은 도시 지역은 5개 이상 갖추었지만 군부로서는 처음이지요. 그래 각 단체의 사기가 크게 올라가게 됐지요.”
다음 부안읍 자치위원회 책임 맡아 5년 일했다. “부안읍만 자치위원회가 없었는데 그걸 맡으라 해서 부안읍의 문화 예술은 물론 산업 경제에 이르기까지 맘먹고 정리 했어요. 부안읍은 실상 부안군의 중심인데도 마치 부안군의 부속 같은 걸로 알던 것을 제 위상을 찾게 됐지요.”

부모님의 나들이. 2000년 초 부안 댐 공원에서

변산 마실길 200리

그가 가는 곳엔 바람이 일었고 새로운 역사가 기록 되었다. 양규태의 얼굴은 바로 ‘마실길’에서 크게 들어났다. 역대 군수의 야심작 ‘변산 마실길’200리는 실상 양규태의 부안 변산의 바닷가만이 갖는 독특한 맛을 발굴, 섬세한 필치로 디자인한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변산 마실길’은 그저 산책로로 그치지 않는다. 사단법인으로 발족,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다. 자기가 만들어 자기가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곱다란 얼굴에 항상 웃음을 머금은 입, 공사 간에 험한 말을 할 줄 모르는 자세, 원칙에 충실한 사람. 좁은 부안 바닥에서 공직을 지내고 부안을 떠난 적이 없는 그인지라 이런 저런 많은 사람들이 그와 인연을 맺었다. 그런데도 그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자세다.
부안의 문화와 예술을 어떻게 활짝 꽃피울 것인가. 자나 깨나 그의 관심은 이것 밖에 없었다고 한다. 여기 저기 조형물엔  그의 흔적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글재주가 남다르고 부지런해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폭포나 파도 같은 격정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 잔잔한 호수처럼, 마을 앞을 흐르는 시냇물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여기 몇 개를 소개한다.
산문집- ‘해는 질 때가 더 아름답다’, ‘아직도 왼손이 남아 있습니다’, ‘나를 버리면 천하를 얻고’, ‘입술 보다 더 따뜻한 사람’, ‘강물에 귀 씻는 사람’, ‘변산 마실길 안내집’, ‘변산 문화와 역사’, ‘변산 마실길 문화’, ‘변산에 가면 문화를 만난다’, ‘변산 마실길 세상사는 이야기’, ‘변산 마실길 200리’

양규태 작사, 박화실 작곡 ‘마실길 추억’

자칫 잊혀 지기 쉬운 부안의 문화 예술인을 부안 사람들에게 새삼 선보였다. 육자배기 국악인 김옥진, 추담 홍정택, 석암 정경태, 독립운동가 김낙선 의사의 비문을 새기고 부안 댐 아담한 곳에  매창과 석정, 백양촌 신근, 범영 김민성 등 여러분의 시를 한데 모아 공원을 조성케 한 것은 그의 일품이오, 역작이라 할만하다.
시인 김용옥은 양규태 선생을 가리켜 선승(禪僧)이라 했다.
- 종교는 가지고 계세요
“더러 누가 물으면 백동교라고 하지요”
- 백동교?
“저희 할아버지 호가 백동(栢洞)입니다. 그 마을이 우리 버들 양자 양씨들 세거지지요. 꼿꼿한 선비였던 할아버지의 선비정신을 본받자는 그런 뜻으로 웃으며 하는 소리지요.”
부인 정대덕 여사(75)와의 사이에 2남 1녀. 장남 두흠(53) 은 삼성전자 간부고 차남 승흠은 전주에, 딸 묘현과 사위 이영기도 전주에 살고 있다. 65년 군청 초임 시절 양가의 할아버지 사이에 말이 나와 부안과 함평 노령산맥을 넘어 백년해로를 맺었다고, jb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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