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산 일원의 모습

1894년 1월 10일, 고부 관아를 점령한 전봉준은 군중을 통솔하며 봉기의 지속과 확대를 모색하였다. 군중이 봉기했다는 낌새를 알아채고 도주한 고부 군수 조병갑을 추적해서 붙잡아 응징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미 타오른 혁명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분위기를 이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이에 봉기에 참여한 군중 중에서 장정을 우선적으로 선발하여 대오를 갖추면서 노약자들을 귀가시켰으며, 마을마다 5명의 대표를 선발하는 등 보다 조직적인 준비를 마쳤다. 그러면서 진영(陣營)을 고부 관아에서 말목장터로 옮긴 뒤, 백산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백제시대부터 외적의 방어를 위해서 쌓은 산성이었으나 언제인지 모르게 방치되었던 백산에 성을 다시 쌓은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결과적으로 혁명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백산대회가 개최되는 선결작업이 되었다.
전번 글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백산대회 개최는 고부봉기 당시, 무장에서 결의되었다. 그리고 호남 일대의 군중이 백산에 집결하는 방식은 동학의 조직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었다. 즉, 무장 대접주 손화중, 금구 대접주 김덕명, 태인 대접주 김개남 등이 각지의 동학 조직을 최대한 활용해서 조직적으로 백산에 집결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지도자들은 각자 자신들의 본거지를 중심으로 군중을 모든 뒤 출정식을 가진 후 혁명의 장도에 올랐다.

초기 전개과정

백산대회는 혁명을 준비하던 지도부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이었다. 지금처럼 통신이나 SNS(‘Social Network Service’의 약자, 인터넷을 통해 서로의 생각이나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해 주는 서비스) 등이 발달하지 못한 여건에서, 본격적인 혁명의 출발을 일반 백성에게 알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였다. 즉 수많은 군중이 한데 모여 백산대회를 개최하였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게 함으로써 홍보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백산대회를 통해 혁명군을 조직하고, 혁명군이 추구하는 목표와 지켜야 할 군율 등을 밝힘으로써 본격적으로 혁명이 시작되었음을 대내외에 선포하는 것이었다. 고부봉기는 혁명의 출발로 이해되지만,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더욱이 고부봉기에 참여한 군중은 다양하였고, 장기전에 들어가면서 소강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마련된 다음 단계가 무장기포이다.
무장기포는 사건을 상징하는 명칭부터 ‘봉기’가 아닌 ‘기포’라는 데에서 그 성격을 유추할 수 있다. 즉 일반 농민의 역할보다 동학교도의 역할이 컸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으며, 고부봉기에서 백산대회로 넘어가는 경유지의 성격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즉 소수의 동학교도와 다수의 농민이 참여한 고부봉기가, 동학의 조직과 교도를 동원하는 무장기포로 전환된 것이다. 특히 무장기포는 고부봉기와 달리 전봉준과 손화중의 만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봉준과 최경선이 고부봉기를 주도했다면, 무장기포는 전봉준과 최경선에 더해 손화중이 합류한 것이다. 이처럼 고부에서 시작된 혁명은 무장을 거치면서 확대되었는데, 그것은 지도부의 인적 구조와 군중의 참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백산창의비

역사에 기록된 숫자는 과장과 축소, 더 나아가 기록자의 의도에 따라 그 차이가 크기 때문에 때로는 의미를 두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고부봉기와 무장기포, 그리고 백산대회에 관한 기록을 보면, 수치의 정확성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그 차이는 분명하다. 즉 고부봉기에서는 1천여 명, 무장기포에서는 4천여 명, 백산대회에서는 8천여 명 등 그 숫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고부와 무장과 백산이라는 공간의 이동, 이에 따른 군중의 참여에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며, 이것은 고부에서의 봉기가 무장을 거쳐 백산으로 이어지면서 점차 확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백산대회에서 비로소 조직된 혁명군의 지도부는 다음과 같았다.

- 총대장(總大將) 전봉준
- 총관령(總管領) 김개남·손화중
- 총참모(總參謀) 김덕명(金德明)·오시영(吳時泳)
- 영솔장(領率將) 최경선(崔景善)
- 비서 송희옥(宋憙玉)·정백현(鄭佰賢)

백산대회에서 조직된 지도부를 보면, 그 당시 동학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 등 교단의 지도부가 전혀 참여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반면에, 이른바 동학농민혁명 3대 지도자로 불리는 고부접주 전봉준, 무장 대접주 손화중, 태인 대접주 김개남은 말할 것도 없고, 5대 지도자로 불리는 금구 대접주 김덕명과 태인의 최경선이 등이 모두 동학교도이고, 다른 지도자들 역시 동학을 매개로 한 연결고리임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호남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시영과 정백현은 무장, 송희옥은 정읍 또는 부안이며 전봉준과 인척간이다. 이처럼 전봉준을 비롯한 지도부는 동학이라는 매개와 함께 지역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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