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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김진배가 만난사람 34>격포 어촌계의 터줏대감 김현채(金鉉彩)
입심 좋은 김현채 씨 ⓒ장정숙

“까시란 사람 말랑하게 하는 재주가 있지”

감 많이 나는 곳으로 안 부인이 복덩이

환갑을 넘긴 나이인데도 고개가 빳빳하고 허리가 곧다. 1미터 72에 70킬로의 당당한 체구다.
- 무슨 운동을 하셨습니까?
“왜요?”
- 하도 몸매가 좋고 풍채가 당당해서요.
“제가 무슨 인터뷰 할 째비가 못 되는 사람인데 부득부득 의원님이 하자하자 해서 시간을 쬐끔 냈는데 뭐 그런 걸 물어 보세요? 젊어서 고학이라도 하겠다고 집을 나가 서울로 어디로 돌아다닐 때는 태권도를 좀 했지요. 어서 다른 거나 물어보세요.”
4-5일 뒤에 또 무슨 태풍이 온다고 뒤숭숭한 오전, 격포항 수협건물이 있는 ‘터줏대감’의 ‘채석강 수산’, 양쪽 네 사람이 앉아 한 잔 할 만한 식탁에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나는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이 분은 나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고, 더구나 왕년에 나를 위해 활동도 많이 했다고 한다. 나는 이 분에 대해 이러고저러고 별 생각이 없는데, 그쪽으로 보면 자기가 잘 아는 사람이 모른다거나 모르는 체 한다면 얼마나 섭섭할 것인가. 인간관계라는 것이 저마다 생각이 다른 것은 물론 아예 잘못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많을까 싶다.

채석강수산 중매인 22호  

- 언제부터 갯바닥을 뜯어먹고 살았습니까?
“글쎄요, 언제부털까”            
- 수산업을 하시거나 어판장 중매인이 되신 게……?
“얼마 되지 않아요. 한 20년 될까. 선대부터 여기 격포 토박이로 살아 왔지만 수산업은 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바다는 거저 바다가 아니잖아요. 얼마나 많은 어부들이 저 바다에서 죽거나 다쳤습니까. 채석강 구경 오는 사람들이나 생선회나 찌개 자시러 오는 분들이 보는 그런 바다가 아니잖아요. 또 그때나 지금이나 배 하나 지으려면 엄청난 돈이 들지 않습니까. 농사는 손바닥만 한 산비탈 밭뙈기라도 부치고 살 수 있지만 바다는 그렇게 안돼요. 어떻든 이런 일 저런 일 여기 격포 바닥에서 하다가 여기 어민들과 관계를 가진 게 ‘새마을 금고’ 이사장을 하다가 ‘어촌계’ 책임을 맡게 됐어요.”
- 아, 그렇게 됐습니까, 어떤 연유로?
“격포 윗동네 격포 격상 마을만 하더라도 100여 호 되지 않습니까. 거기 이장을 한다고 오토바이 타고 바쁘게 돌아다닐 때였어요. 동네에서 약방을 하는 분이 “내력 없이 왔다 갔다 `비 하니` 돌아다니기만 하면 뭐하나, 실속이 있어야지. 자네는 새마을 금고에서 일해 봐”, 하는 거예요. 그분이 여기 마을금고 이사장을 맡고 있었어요. 그래 귀가 솔깃했죠. 서울 가서 며칠 새마을 금고 운영 하는 실무 교육을 받았어요. 내려와서 일을 하는데 예금이 쑥쑥 올라가요. 1-2년 하다 보니까 어떤 사람들이 돈을 맡기고 어떤 사람들이 돈을 빌려 가는지 환히 알 게 됐어요. 내가 여기 이장을 10여년 했으니까 누가 누구인 줄은 환하게 알지, 그런데 참 눈이 번쩍 띄었어요. 돈을 맡기는 사람들이 농사짓는 사람들이 아니라 수산업이거나 수산물을 거래하는 사람들이예요. 그나저나 가난하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왔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돈의 단위도 어업 쪽이 크거니와 자주 넣고 빼야 돈이 되잖아요. 돈의 회전 속도가 농수산 같은 1차 산업과 음식점이나 중매인 같은 서비스 산업과는 크게 다르단 말입니다.”
- 그래서 어땠어요?
“그제서야 어촌계를 만들고 그 책임을 맡게 됐어요. ‘채석강 수산’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중매인 22호’로 등록했지요.”
- 지금 사람들은 김 선생을 ‘회장’이라고 부릅니까, ‘사장’이라고 부릅니까.
“그 사람들 편한 대로 부르지요. 회장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장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이장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어촌계의 책임자니까 ‘어촌계장’이고 중매인들의 대표니까 중매인 대표지요. 뭐라고 부르면 어때요, ‘조합장’이면 최고로 알고 더러 대접한다고 ‘조합장님’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저는 상관 안 합니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봉사하면 그만이지.”

갯가의 아버지와 아들

까시란 사람들을 말랑말랑하게 하는 재주

김현채. 1959년 9월 13일 생, 우리 나이로 62세다. 변산면 격포리 격상길 4-1이 주소다. 사업장은 부안수협식당 건물 아래층에 있다.
모항 국도변 왼쪽 외딴 집에서 사는 부안 농민운동의 대부로 통하는 박 아무개에게 김현채라는 분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았다.
“참, 이 양반 재주가 보통이 아니여. 격포 사람들이 얼마나 까시라(까다로와). 이 까시란 사람들을 말랑말랑 하게 허는 재주가 있어”
어떻게 부지런한지 궁둥이가 가볍다는 말이었다. “새벽이고 밤중이고 오토바이 타고 동네를 휙 한 바퀴 돈단 말입니다. 발은 가볍고 귀는 밝고 입은 무거워.”
우리 박배진 씨 같은 분 아니냐고 부추기자 “먼말을 그렇게 한 대여”하며 손을 설레설레 젓는다. 자기는 진짜 까시란 사람이라고.
“격포초등(20회), 변산서중(마포에 있는 실업계 연초고등학교) 나와 어데 고등학교 가야 할 텐데 읍내 고등학교 갈 형편도 되지 않는 겁니다. 그래 마침 경기도 안양에서 직장에 다니는 큰 집 형님이 계셨는데 어데 야간고등학교를 가든 취직을 하든 올라오라 해서 갔는데 이것도 저것도 마땅치 않아요. 몇 달 동안 빈둥빈둥하는데 마침 격포 집에 군대 영장이 나온다 해서 내려 왔어요. 79년이든가 80년 초든가……”
- 첫 직장이랄까 월급 받은 곳은 어디였습니까?
“그거 뭐 월급이랄 것도 없지요.”                      
- 그래도.
“허, 그때도 ‘방위’가 있었는데 거기 중대본부 행정 일을 보았어요. 육군 일등병한테 주는 수당, 정말 화랑 담배 몇 갑 값이지요. 그래도 다달이 월급날 되면 꼬박 꼬박 받았으니 그래 적다고 월급 아닙니까.”
말을 아주 재미있게 하는 재주, 대단한 특기다. 자기가 나고 살던 집에서 잠자고 밥 먹고 동네 중대본부에 나가고 그렇게 2년 몇 달 지내면 어엿하게 군대 복무를 마치는 그런 특전을 어찌 고맙게 생각 않겠는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김현채는 여기에서 조직의 원리를 배웠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익혔으며 그때 모시던 상사들을 받드는 가운데 충성과 복종관계를 체득했다고 한다. 지서리에 1중대, 마포에 2중대, 격포에 3중대 등 3개 중대가 있었는데, 자기는 신왕철 중대장(전 변산농협 조합장)이 이끄는 3중대 소속이었다. 1중대장은 김선곤(뒤에 부안군의회 의장, 도의원) 2중대장은 오세웅(전 부안군의회 의장)이었다. 격포 새마을 지도자, 변산면 4H 연합회장, 웬만한 감투는 ‘사양 않고’ 썼다고 한다.
남의 심부름하는 것이 좋았다. 그것을 사람들은 ‘봉사’라고 부른다. 돈 욕심으로 하거나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은 봉사로 여기지 않았다.
- 정당 활동을 하거나 농어민 운동, 노조활동 같은 건?
“그게 다 인연 따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5.18 한참 뒤 정치활동이 재개되자 그나마라도 야당을 하자 해서 이쪽에서는 민한당을 많이 밀게 되었어요. 그때 이쪽에서는 김선곤, 이석기, 오봉옥 씨 같은 분들이 야당을 밀었어요. 그때 야당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야당 하다가 어떻게 되는 건지 알지 않느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될 텐데 왜 사서 주목 받을 일을 하느냐는 거지요.”
- 그래 곤욕을 치른 일도 있습니까.
“거기까지는…… 그 얼마 뒤 김대중 선생이 미국 망명에서 돌아오셔서 ‘새정치국민회의’인가를 할 때는 우리 격포에서도 십여 명이 여의도 대하빌딩에 가서 선생님을 뵈었어요. 그 훨씬 전 선생님이 망명에서 돌아오실 때도 우리는 ‘DJ 편’인 셈이었어요. 뒤에서 말입니다.”
- 격포 어촌계는 어느 정도 규모입니까?
“계원이 170명이고 자산은 약 10억, 생각보다 작지요?”
- 조합장이랄까, 계주의 보수는?
“보수 없고 년 600만원의 활동비가 예산에 올라 있어요. 그래도 이장보다는 나은 셈이지요. 지금은 아주 편한 세상 됐어요. 이 핸드폰 덕에. 여기 좀 보세요, 여기에 별 것이 다 올라와 있어요. 여기 위도 격포 날씨는 물론 심지어 선어 공판시간까지. 이거 하나면 경리 장부가 되기도 하고……”
핸드폰을 이리 저리 휘젓는 솜씨가 아주 익숙하다.
아침 9시부터 한 시간쯤 사무실에서 이야기 하다 경매를 하는 부두에 갔다. 수협 사무실 앞 선착장에서 서넛의 선원들이 부지런히 생선상자에 생선을 담아 육지 판장으로 올리면 경매사가 생산 종류와 수량을 큰 소리로 외친다. 마이크도 스피커도 없다. 모닥모닥 여나문 중매인들이 바쁘게 오른 손을 높이 들어 손가락을 놀린다. 아침에 올라온 생선은 전어, 꽃게, 광어, 우럭, 조기, 갈치 등 20여 상자. 경매는 순식간에 끝났다. 먼 곳으로 떠나는 냉동차나 여기 격포 바닷가 횟집에 넘길 1톤짜리 트럭이나 선착순이다.
- 요즈음 어황은 어떻습니까.
“가을 들어 조금 살아나는 듯 싶기도 하고. 봄에는 아주 좋지 않았어요. 봄에는 한 40%는 줄었어요. 전어, 꽃게는 좋을 때는 격포 이쪽에서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으니까. 100억 정도 됐지요. 거기에다 관광객이 쑥 줄어들고. 이쪽 칠산 어장은 생선의 종류가 다른 어느 곳 보다 다양 했어요. 쭈꾸미, 갑오징어, 농어……”

모처럼의 가족 나들이

- 사모님과는 어떻게 만났습니까?
“부모 덕은 못 보았어도 채석강 덕은 보았어요. 제 6촌 여동생이 서울의 어떤 군부대에서 일했는데 거기에 군무원으로 일한 아가씨가 있었어요. 타이피스트지요. 변산반도가 국립공원이겠다, 채석강 유명하잖아요. 그래 같이 내려와서 나랑 셋이서 구경도 하고 그랬지요. 서울 올라갔는데 편지만 오고 가서 되겠어요? 더구나 서울 아가씬데. 그래 마침 감을 보냈어요. 그 동생 고향집이 백산이었거든요. 그래 집에 있던 감인데 이거 격포에는 더 많은 감이 있다고 풍친 모양이에요.”
1990년, 이들은 부안읍내 시장 통에 있는 신세계예식장에서 백년해로를 다짐했다. 친정 쪽에서는 뭐가 부족해서 서울 처녀가 시골로 시집가느냐고 시큰둥했지만 장인 되는 분이 “그만 하면 인물이다, 인물!”하는 바람에 오래 끌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보다 다섯 살 밑인 박향란(朴香蘭) 여사다.
“저 사람이 살림 다 해요. 나는 비 하니 돌아 댕기기만 하고……”
격포 사함들은 이 ‘부지런한 현채’가 보건소가 없어 급해도 읍내나 지서리까지 가던 30여 년 전 `비 하니` 오토바이 타고 격포뿐만 아니라 소격, 도청, 죽막, 종암에 이르기 까지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수백 명 주민들의 연판장을 받아 마침내 이를 성사시킨 공을 기억하고 있다. 부인과의 사이에 2남 1녀. 큰 아들 영택은 가업인 채석강 수산에서 일을 배우고 있다. jbk 

김진배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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