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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대회는 언제 결의되었나
  •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 승인 2019.10.15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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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3월 봉기도

1893년 11월, 고부에서 ‘사발통문거사계획’이 결의되었는데, 이전의 농민봉기와 차원을 달리하는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즉 “전주를 점령하고, 서울로 직향할 것”이라는, 조선정부에 대한 전면적인 선전포고였다.
그러나 이 결의는 같은 해 11월 말, 고부 군수 조병갑의 익산 군수 발령으로 보류되었다. 그렇지만 사발통문거사계획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먼저 전라 감사 김문현에게 고부에서 자행되는 폐단을 시정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거부되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탄압을 받았다. 이에 전봉준을 비롯한 주요 인물은 12월 10일에 이웃 고을 무장현 동음치 당산리 송문수 집에서 회의를 가졌다. 이때 결의사항은 ‘전라 감사 김문현의 폭정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결의가 그대로 결행되지는 않았지만, 비밀스럽게 결의된 내용이 언제 누설될지 모르는 위험 부담이 있었다.
다른 한편, 익산 군수로 발령된 조병갑은 후임 군수의 부임을 핑계로 고부를 떠나지 않고 평상시처럼 수탈과 착취를 일삼고 있었다. 이와 함께 전라 감사 김문현을 통해 재임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고부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고, 조병갑의 재임이 유력하다는 판단이 서자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전면적인 봉기였다.
이렇게 하여 1894년 1월 10일, 고부관아를 점령하면서 고부봉기가 시작되었고, 혁명의 횃불을 밝히게 되었다. 고부 관아 점령 후 혁명의 지속과 확대를 모색하던 지도부가 두 번째 모임을 갖은 것은 같은 2월 19일, 무장현 공음면 신촌리였다. 여기에는 훗날 혁명의 주요 지도자로 등장하는 전봉준․손화중․김개남․김덕명․정백현 등 1893년 12월에 있었던 첫 번째 모임보다 더 많은 지도자들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때 무엇을 결의하였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목격한 일본인이 쓴 「전라도고부민요일기」

이 모임에서는 향후 동학농민혁명의 전 과정을 관통하는 모든 얼개가 논의되고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같은 3월 26일(양력 5월 1일) ‘백산대회’ 전에, 이처럼 많은 주요 지도자들이 참석한 모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가장 신중한 태도를 취한 인물은 손화중이었다. 그 당시 전라도 일대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본래 성품이 차분했던 손화중은 동학 교단과 관계 역시 가장 돈독하였다. 따라서 봉기에 따른 위험부담을 가장 크게 질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어쨌든, 2월 모임 이후 고부봉기의 확대가 본격화되었고, 안핵사 이용태의 만행이 명분을 제공하였다.
이처럼 고부봉기의 지속과 확대가 모색되던 시기, 백산은 고부봉기에 참여한 군중에게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되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백산은 “백산은 조선의 비결(秘訣)에도 적혀 있을 정도의 땅으로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일면만이 겨우 인마가 다닐 수 있으며, 근방은 유명한 평야로서 백산만 우뚝 높다. 비결에 이르기를, ‘고부의 백산은 만민을 살릴 수 있다.(可活萬民)’고 하였다.”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고부 관아를 점령한 군중은 말목장터와 백산을 군중이 머무를 전략적 요충지로 상정하였고, 백산에 있는 세고(稅庫)를 점령하며 확보한 식량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기존의 토성을 견고히 다지는 축성(築城)을 하는 등 오랜 동안 머물렀다. 다른 한편, 무장기포가 일어나기 10여 일 전, 동학농민군 약 3,000여 명이 금구에서 태인을 거쳐 부안(扶安)으로 가는 것을 태인에서 볼 수 있었는데, 이들은 지역을 순회하면서 군중의 참여를 독려하는 등 백산대회에 총력을 기우리고 있었다.

「전라도고부민요일기」에 소개된 백산

1894년 3월 20일(양력 4. 25) 경, 무장에서 집결한 군중은 고창과 흥덕을 거쳐 고부관아를 재차 점령한 뒤 백산대회에 참여하였다. 이 때 군중을 이끈 주요 지도자는 전봉준과 손화중이었다. 그런데, 백산대회에 합류한 뒤 손화중과 함께 총관령을 맡은 김개남, 오시영과 함께 총참모를 맡은 김덕명, 그리고 영솔장을 맡은 최경선 등은 이들의 움직임과 달렸다. 김개남의 경우는 태인에서 출정식을 가진 뒤, 전봉준과 손화중이 합류한 무장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백산에 합류하였다. 이것은 백산대회가 사전에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그렇다면 백산대회는 언제 결정되었는가. 그것은 1894년 2월 19일, 무장현 공음면 신촌리 회합이었음이 분명하다. 지금처럼 통신여건이 발달되지 않았던 그 당시, 문서나 인편으로 중대 결정을 일방적으로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고, 사전에 충분한 논의가 있은 뒤 결정되었을 것으로 판단해 볼 때, 지극히 합리적인 추정이다.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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