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선거에서는 ‘우리’편 따지지 말고 뭇생명 살릴 사람인가를 따지자

한국인은 ‘정’에 산다. 유통기한이 있는 사랑과도 달라서 이 ‘정’이라는 것은 숙성기간이 필요하다. 주고 또 주고도 못다 준 것만이 가슴아픈 사랑과 달라서 이 ‘정’은 ‘고운 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론 ‘정’에서 ‘노염’이 나기도 하고, 보기 싫은 사람이지만 어쩔 수 없이 보고 챙겨주면서 ‘미운 정’이 들기도 한다.

어떻든 이 정이란 것은 우리 민족이 결코 만만하지 않은 세월을 건너오면서 숙성된 우리민족의 정서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정을 쏟고, 정에 울며’ 숱한 나날들을 살아왔다. 그래서 먼 친척보다 나은 이웃사촌이 되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어렵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온정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는 마땅히 나라가 거두어드린 세금으로 책임져야할 국민들의 치료비마저도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하여 인정에 호소, 나라를 대신해서 시민의 인심과 정으로 그들의 치료비를 떠안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 정말 눈물나게 아름답고 인간다운 정이란 것이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 같다. ‘타자’에 행해지는 비정한 사례들은 끔찍스럽고 놀라울 지경으로 우리가 ‘정 넘치는 민족’인가를 의심하게 한다.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행해지는 학대와 불평등과 멸시는 정도를 넘어 선다.

진정한 진보라고도 할 수 없는 상대적으로 진보측인 진보에 대한 보수의 막말-언제부턴가 대통령 씹기가 전국민의 오락이 되어버려 어쨌든 우리가 뽑은 우리의 대통령에게 등신이라는 막말까지 퍼부어대는 어처구니없음은 민망하기까지 하다.

또한 인터넷상의 악성 댓글로 상처받은 ‘통일의 꽃’ 임수경의 경우는 타자에게 가해지는 비정함의 극치를 보는 것 같아 섬뜩하다.

임수경은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남한의 대학생 대표로 참가하여 군부세력이 집권한 당시의 냉전 상황에서 ‘분단을 시대의 문제’로 끌어내 남과 북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고 문규현 신부의 손을 잡고 판문점을 통해 남으로 내려와 보안법을 어긴 죄로 3년5개월 형을 살았다.

그런 그녀가 작년 7월에 필리핀에서 9살 난 아들을 익사 사고로 잃었다. 이를 보도한 인터넷 기사에 보수를 자처하는 대학교수를 포함한 인물들이 ‘빨갱이년의 아들은 죽어도 싸지’라는 등의 도를 넘는 댓글을 달았다. 결국 인정은 고사하고 대학교수로서의 인격과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보이지 못한 그들 25명은 법의 심판대에 서게 되었다.

‘우리’에게 넘치는 ‘온정’이 ‘타자’에게는 지나치게 ‘비정’해지는 이런 성향 때문인지 우리는 대체로 모르는 사람과 첫인사를 나눈 후에는 그와 어떻게 우리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해 나도 모르게 골몰한다. 그래서 본이 어디인가를 따져 혈연을 통한 우리를 만들고, 어떤 동네에서 태어났는가를 따져 지연을 통한 우리를 만든다.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를 따져 학연을 통한 우리를 만드는 것도 안 되면 “누구를 아세요, 누구를 아세요”라는 질문과 답변을 통해 어떻게든 끈끈한 ‘우리’를 만들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한다.

이런 식으로 일단 우리가 만들어지면 정을 나누며 돈독한 정을 쌓아가고 모든 것이 ‘정’으로 해결된다. 가히 “일구야! 대한민국에 (‘정’으로)안 되는 게 어딨니?” 라고 의기양양하게 큰 소리 치는 개그가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세력들은 때로 이런 우리의 정서를 악용하기도 한다. ‘우리가 남이가?’, ‘이 선거에서 패배하면 우리는 모두 영도다리 아래서 빠져죽어야 한다.’라며 영남 세력을 결집시킨 세력들을 우리는 아직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심지어 능력 있는 사원을 모아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 시켜야 하는 냉정한 기업체에서도 타자를 배제한 우리들끼리의 ‘온정’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우리나라 4대 그룹 경영진을 보면 그룹 총수가 영남인 삼성은 사장급 이상의 임원이 영남 출신이 50,9%를 엘지는 62,1%를 차지하고 있으며 엘지는 사장급 이상 임원에 호남 출신이 0%란다. 상대적으로 그룹총수가 북한출신인 현대와 경기출신인 에스케이는 지역편중 현상이 안 보인단다.

이런 숱한 예들을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내 어머니 아버지가 아닌 어른들 누구에게도 쉽게 어머니 아버지라고 부르며 늙어 입이 쓴 어른들에게 달콤한 사탕을 주고 논에서 같이 일손을 돕던 그 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우리의 단체장 선거도 있었지 않은가.

올 한 해는 풀뿌리민주주의의 한 축이 되는 기초의원과 단체장을 선출해야 한다. 이제 우리도 더 이상 온정주의에 사로잡히지 말고 냉정해지자. ‘우리’ 편인가를 따지지 말고 부안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부안의 아름다움과 뭇생명을 살릴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하는 사람인가를 따지자.

후대하는 마음이 지나치면 뜻대로 부릴 수가 없고,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치면 명령할 수가 없다. (손자병법의 지형편)

받들어 모실 사람을 뽑는 선거가 아니고 부릴 일꾼을 뽑는 선거라면 정말 냉정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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