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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봉기와 무장기포에 대한 엇갈린 평가
  •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 승인 2019.10.09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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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현등상동학인포고문(茂長縣謄上東學人布告文)

동학농민혁명 초기 전개과정 중의 하나인 ‘무장기포(茂長起包)’를 글자대로 해석하면 무장에서 기포하였다는 뜻이 된다. 이를 좀 더 쉽게 풀이하면, 군사 행동으로 전투를 치르기 위해서 총이나 칼 등 군대 장비를 갖추는 무장(武裝)이 아니라 무장(茂長)이라는 지명을 가진 장소에서 동학의 조직인 포를 중심으로 일어섰다는 의미이다. 즉 전라도 무장현에서 동학을 주축으로 하는 군중이 봉기하였다는 의미를 갖는다.
무장기포는 한 때 ‘무장봉기’로 불리었는데, ‘무장’이라는 단어가 지명이 아닌 군사력을 갖추는 ‘무장(武將)’으로 해석되어 전혀 다른 뜻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따라 불필요한 오해를 차단하고, 실질적으로 동학 대접주 손화중을 비롯하여 동학인 다수가 참여하는 무장현에서의 봉기라는 뜻을 가진 ‘무장기포’로 정리되었다.
무장기포는 동학농민혁명 초기 전개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과정 중의 하나이다. 고부에서의 봉기를 지속하고 확대시키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무장기포 이전인 2월 19일에는 주요 지도자들이 무장현 공음면 신촌리에 모여 무장기포와 백산대회 등 봉기의 지속과 확대를 결의한 공간이다. 또한 무장현은 그 당시 무장현의 남쪽 지역, 현재의 전라남도와 광주는 물론 제주도에서 혁명에 참여하려는 군중이 경유하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즉 무장현을 거쳐 백산대회에 참여하려는 군중이 일시적으로 운집하는 장소였다.
전봉준을 비롯한 고부봉기 주도세력이 고부를 떠나 무장현으로 이동한 것은 3월 13일이었고, 무장현에 군중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3월 16일부터였다. 전봉준이 무장으로 떠나기 전에 고부에서 무장 집결을 알렸음을 알 수 있다. 무장현에 모인 군중은 죽창을 비롯한 무기를 장만하고 군사훈련을 하면서 혁명을 준비했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 포고문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마침내 1894년 3월 20일(양력 4월 25일) 경, 무장현 공음면 구수내에서 전봉준과 손화중이 ‘무장포고문(茂長布告文)’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행로는 고창현과 흥덕현을 지나 부안 줄포를 거쳐 고부관아를 다시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때 줄포에서의 상황은 “2,000~3,000명이 말을 타거나 혹은 걸어서 각각 총과 창을 가지고 와서 줄포의 사정(射亭)에 모였는데, 깃발의 구호는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을 쓰거나 혹은 순천(順天)․광주(光州)라고 썼습니다.”라고 전한다. 이를 통해서 흥덕을 지난 고부로 향하던 동학농민군이 부안 줄포에 있는 활터에 모였으며, 이들 중에는 백산대회에 참여하려고 순천과 광주에서 올라 온 무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무장기포 이후 무장현이나 고창현, 또는 흥덕현의 관아가 아니라 고부관아를 재차 점령한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 당시 고부가 군(郡) 단위로 가장 큰 행정단위였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혁명의 최초 불길이 고부 관아 점령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즉 고부관아 점령을 통해 이미 혁명의 횃불을 올렸고, 지역 단위를 넘어 전국 단위로 확산시키는 상징적 사건으로 고부관아 재점령을 잡은 것이다.
전라도 무장현에서 ‘무장포고문’을 선포함으로써 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므로 무장기포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라는 주장이 현존한다. 바로 2004년에 제정․공포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과 현재 중․고등학생들이 사용하는 검인정한국사교과서이다. 그 근거는 전봉준이 고부를 떠난 3월 13일부터 무장기포가 일어나는 3월 20일까지 일주일 동안 본격적으로 혁명을 준비하였고, 특히 고부라는 한정된 지역을 벗어나 무장현으로 확대되어 비로소 지역단위를 넘어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무장기포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라는 흐름은 고부봉기가 혁명의 시작이라는 기존의 인식과 달라 ‘뜨거운 감자’가 되고 말았다. 얼마 전, 정읍시의회와 고창군의회가 서로 무장기포와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라는 양보할 수 없다는 주장을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일회성으로 끝날지,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재현될지는 알 수가 없다.

고부봉기를 상징하는 동학농민혁명 최초 봉기탑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동학농민혁명 초기 전개과정에서 일어난 거사계획, 고부봉기, 무장기포, 백산대회, 황토현전투 등 개별사건의 의의와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따라서 개별사건의 문제점을 지적하거나 비하하기 보다는 존중과 상생을 모색하는 현명한 지혜가 필요하다. 따라서 고부봉기와 무장기포에 대한 엇갈린 평가에 대한 대안으로 백산대회를 추천하고자 한다.

박대길(부안군/문학박사)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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