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발이 유달리 커서 일하기 좋다는 남선염업 신종만 사장. 자택 거실에서 ⓒ장정숙

백년 방앗간에 휴식은 없다

월정사 연꽃 보시에 인생을 걸고 

작달막한 키에 얼굴 어느 한구석 찌든 곳이 없다. 항상 미소를 띠고 뭔가 좋은 일을 기다리는 그런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으레 뭔가 만지작거리며 두 손을 움직인다.
“무얼 좀 손보았더니 팔 다리까지 뻐근하네요.”
갑작스런 필자의 방문에 어리둥절하며 “손이나 씻고요” 하며 거실이자 부엌에 붙은 세면대 있는 쪽으로 걸어간다. 참으로 오랜만에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뭐가 그리 바쁘세요? 저녁 까지.
“내일 강원도 월정사 가요. 해마다 10월 11일부터 월정사 성보 박물관에서 여는 ‘연꽃 춤’이라는 사진 전시가 있거든요”
-얼마 동안이나 전시 합니까?
“6개월이오, 여섯 달!”
오대산 월정사하면 가보지 않은 사람, 절간이나 불교와 인연이 없는 사람도 ‘아, 거기’하고 알아주는 명찰이다. 그런 특전이 아무에게나 주어지지는 않을 듯 싶다. 가히 사진작가 몇 사람에게나 돌아갈 특전이라 할 만 하다.
-이번에 몇 점이나 출품 했습니까?
“25점이오. 내일 저녁에 전시를 위한 마지막 준비 모임이지요. 주최하는 성보박물관 쪽과 작가들이 모여 마지막 점검을 하는 거지요.”
내일 갔다 하룻밤 자고 바로 모래 새벽에 강원도 평창 오대산에서 부안까지 천리가 넘는 길을 돌아온다는 이야기.
-나이가 어떻게 되지요?
“왜요? 1947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일흔 셋인가”     
그 나이로 4백 몇 십 킬로 천리 길을 자기 차를 손수 운전한다. 그것도 옆에 아무도 태우지 않고 혼자서 몰고 다닌다니!
-그 코스가 궁금한데 어떤 길로 오고 갑니까.
“저만 다니는 길이 있어요. 철따라 다르고 날씨 따라 다르고 또 내 몸 컨디션이나 붐비고 한가한 시간 따라 달라져요.”
-그 길, 부안읍내에서 오대산 월정사 길을 몇 번이나 다녔습니까.
“누가 세어 보았나요. 아마 서른 번 마흔 번 쯤 되지 않을까……”
-그렇게 많이요?
“월정사에서 연꽃을 주제로 출품한지가 10년이 넘어요. 출품 준비에 두세 번은 가야 하니까요.”
-바로 코앞에 있는 월명암보다 더 많이 갔겠네.
“월명암도 많이 갔지요. 월명암이나 내소사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어른들 등에 엎혀 갔으니까요.”       -이번에 출품한 작품의 소재는 어디 연 꽃이지요? 요즈음은 김제 어디 무안 어디 또 충청도 어디다 해서 아주 관광산업 겸해서 큰 연 방죽들이 많은데 어디 한 군데 연꽃입니까, 아니면 여러 곳 꽃입니까?
“출품한 25점 전부가 정읍 태인에 있는 피향정(披香亭) 연꽃이에요,"

월정사 성보 박물관 출품작 ‘연꽃 춤’ 75 X 50. 피어오르는 꽃봉우리에 벌이 다가선다.

-왜 거기 연꽃을 알아줍니까?
“우선 피사체가 모델 아닙니까. 카메라 앵글을 대기 좋아야지요. 거기에다 새로 연꽃을 심어서 아주 싱싱해요.”
-피향정은 통일 신라 시대 최고의 유학자로 꼽히는 최치원(崔致遠)선생의 사적이 있는 곳 아닙니까.
“그렇지요. 이런 사적지가 이번에 정읍시가 큰돈을 들여 아주 좋은 연꽃 방죽을 만드는 바람에 전국적으로 각광을 받게 된 거지요. 부안읍내만 하더라도 우리 어렸을 때는 읍내 주변이 온통 크고 작은 둠벙이 있었는데 이걸 잘 활용하지 못하고 큰 돈 들여 매우고 또 물의 거리다 뭐다 해서 더 큰 돈을 들여 인공 물길을 만들고……”

화려한 데뷔. 건국대학에서 강의하는 함석헌 선생. 이 작품이 전국대학생 사진전에서 특상(문교장관상)을 받았다.

티벳으로 네팔로
미친다는 게 무엇일까. ‘미쳤다’하면 으레 망했다가 따라 붙는다. 주색잡기에 미치고 주식에 미치고 땅 투기에 미치더니 망했다는 투다. 하지만 경마에 미치고 야구에 미치고 화초에 미치고 노래에 미치고 하면 조금은 애교로 보아준다. 미쳤다 해서 그 피해가 본인의 성패와 관계될 뿐 남에게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신종만 사장의 경우 필자가 보기에는 연꽃에 미치고 운전에 미치고 여행에 미친 사람인 듯 싶다. 그렇지 않다면 호기심 많은 10대, 20대의 젊은 날을 수십 년 지난 60이 넘어서까지 비행장이 있는 곳도 3천미터가 넘는 네팔의 포카라와 카투만두에서 한 시즌 서너 달을 보냈겠는가.     
-지금도 히말라야 쪽에서 한 시즌, (3월부터 두세 달과 10월부터 두세 달이 입산 시기다) 한 철을 보냅니까?        
“네, 10여 년 동안 해마다 한번은 그쪽 히말라야에 다녀와야 한해가 넘어가는 것 같아요. 다만 올해는 못 갔지요.”
-그쪽 가시면 어떻게 지냅니까. 열흘 보름도 아니고 몇 달 동안을. 누구랑 뭐하고 지내는지.
“이거 설명하기가 좀 그러네요. 20여 년 전 처음 간 곳은 네팔 쪽이 아니고 티베트 쪽이었어요. 그쪽 가서 보니까 사람 들 사는 게 별 게 아니었어요. 그저 먹고 자고 움직이는 것이었어요. 처음부터 여행목적이 그저 호기심으로 간 거니까 무얼 몇 천 미터 높은 산을 올라 가야겠다든가 그 쪽 풍속이나 그 사람들이 무얼 생각하고 어떻게 사는지 글을 써야겠다는 게 아니었으니까 아주 마음이 가벼웠어요. 처음부터 혼자였지요. 누구 따라가거나 가까운 친구하고라도 같이 가게 되면 먹는 것 자는 것부터 여행 코스까지 꼭 맞추기 어렵지요. 그래서 처음부터 혼자였고 일정도 한 20일 잡았다가 싫으면 앞당겨 돌아오기도 하고 좋으면 반대로 며칠 더 여기 저기 구경도 했지요. 다만 돈은 넉넉해야지요. 넉넉하게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안 쓰는 맛이 있어요. 부안에서 하루에 쓰는 돈의 5분의 1, 10분의 1 가지면 넉넉해요. 특별히 절약하고 말고가 아니라 그 사람들 사는 대로만 살면 돼요.
-그래도 많이 불편할 텐데.
“별로요. 다만 먹는 게 우리와 많이 다르지요. 술 담배 커피 음료수 이런 거 없어도 별로 불편하지 않아요. 저는 원래 이런 거 멀리 했으니까. 속옷이든 양말이든 내가 빨면 그만이고 에어컨이고 선풍기고 전열 기구도 상관없는 물건이고.”
-그래도……
“밥이야 불 때면 되는데 채소는 양념이 있어야 되지 않아요. 그래 그 쪽으로 가는 횟수가 늘어날 때마다 집에서 가지고 갈 양념통이 늘어나요. 된장, 간장, 고추장, 설탕은 물론이고 젓갈이며 굴비 같은 것까지 한 살림을 옮기는 거지요. 비가 와도 우산 같은 거 안 써요. 그 사람들 사는 대로 살면 되니까요. 생활용품 이라는 것이 실상 열 손가락으로 몇 번 셀 정도로 간편해져요.”
-그쪽에서 가져오는 물건은?                           
“가져올 물건이 뭐 있겠어요. 그런데 몇 번 가다 보니까 눈이 티여요. 수십 미터 절벽 위에 꿀이 있다는 거예요. 방을 세 내준 집주인이 가자는 겁니다. 따라갔지요. 벌 쏘이면 대번에 죽잖아요. 그래 주저했더니 풀잎 같은 걸 먹으라 하고 또 그 즙을 얼굴에 바르래요. 밑에서 올려다보는데 정말 꿀통 째 들고 내려오는데 그걸 저보고 가지래요. 여기서 그런 진짜 꿀 그만큼 구하려면 아마 수십만 원 주어야 할 겁니다. 그래 거저 주는 거예요. 사장님이 두 달 집세 많이 주지 않았느냐며.”
-집세가 얼만데?
“한 달을 살든 1년을 살든 처음엔 20달러, 지금은 좀 올랐지만.” 이런 심성좋은 사람들이 신사장의 눈에는 이 지구상엔 없는 듯싶었다. 사람과 사람관계가 흔히 말하듯이 인연이나 이해관계로만 정해지는 건 아닌 거구나, 한집에서 같이 살고 마음을 통하면 정이 들더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지금은 서로 아버지와 아들의 부자관계를 맺었다. 카투만두에서 한국말 공부를 해서 한국으로 유학 와서 지금 강릉대학 무역학과에 다니고 있다. 4년 전부터 줄곧 ‘아버지 신사장’이 돌보았다고 한다. 월정사의 지원으로 학비 면제에 기숙사에서 먹고 잔다. 그 동안 아르바이트 해서 수백반원의 돈을 저축, 지난 여름 고향 네팔을 다녀왔다고 한다.
또 하나, 딸도 있다. 안젤리 열여섯 살이다. 강릉에서 여고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10년 전 제가 포카라에 갔을 때 여섯 살 이었어요. ‘아빠’ ‘아빠’하며 잘 따랐어요. 나도 부안에서 딸 넷을 시집 보냈지만 말년에 또 어린 딸이 생긴 거지요. 이 애는 자기는 아빠가 둘이라며 ‘인도 아빠’와 나를 가리키며 ‘한국 아빠’라고 좋아해요. 이런 애는 어릴 때부터 3개 국어를 하고 세 나라에서 살았으니 말 그대로 국제인인 셈이지요.”

딸부자 신사장 가족. 앞줄 왼쪽이 부인 김일순사, 신사장 옆이 큰딸과 사위, 뒷줄 왼쪽이 외아들 신정우.

100년을 이어온 동중리 49번지 부자
신종만 하면 ‘염전 신사장’으로 통한다. 지금 살고 있는 동중리 49번지는 자기 형제들이 난 집이자 아버지(원섭)와 작은 아버지(형섭)가 난 집이다. 그의 할아버지가 신동근(1896-1970) 작은 할아버지가 신남근(1899-1951), 쌍둥이 같은 형제다. 흔치 않은 백년 이상 부와 명성을 누려온 가문이다. 그의 당숙 신형구(1922-2016)는 부와 함께 권세도 대단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인 신종만은 어린 시절을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는 부족한 것을 모르고 지냈다. 특별히 뛰어난 재주가 나타나지 않아서인지 우쭐댈 줄도 몰랐다고 한다. 몸에 베인 것이 겸손이오, 근검절약이었다.
“사십구라는 숫자를 저는 평생 간직하고 살아요. 제가 난 집이 동중리 49번지요, 제 초등학교 졸업이 부안초등 45회거든요."
-그 뒤 학교는?
“중학교는 서울 한양중학교, 고등학교는 수원농고, 그리고 대학은 건국대 축산과 나왔지요. 고향이나 학교나 어릴 적 친구가 적어요.”
그가 수원농고 다닐 때 할아버지의 친구 한분이 수원근교에 30만평의 땅이 평당 35원으로 경매에 나왔는데 자리도 좋고 값도 무던하니 큰 손자놈 몫으로 사기를 권했다고 한다. 소년 신종만은 그때부터 큰 농장 주인으로 농사를 짓고 싶었다. 하지만 소년이 갖고 싶은 땅은 수원이 아니라 고향 부안이었다.
그때 그 땅 샀으면 수백억 부자가 됐을 텐데 아쉬운 생각이 들지 않느냐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런 횡재가 제 손에 들어왔다면 제 명대로 못 살았을 거예요.”
지금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염전이 30만평이라고 한다. 이 ‘남선염업’은 일제 말기 곰소 축항과 함께 할아버지 형제분이 창업했다고 한다.     
100여 년 전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부안읍 동중리 49번지 집 앞에 ‘신동근정미소’를 차렸다. 줄포에 삼양사 정미소나 서외리 이영일의 정미소가 들어오기 전이다. 원동기 코를 막고 기름으로 모터를 돌리던 시절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그저 지주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익힌 기술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허욕은 금물, 오래 내려온 가훈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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