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짐이 싸하다. 부안의 일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석산 개발을 요구하고, 읍내에서는 주차장을 넓히기 위해 거액의 세금으로 땅을 사려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수년 전부터 골프장 얘기가 나돌더니 급기야 정치권을 중심으로 새만금에 카지노를 짓자는 염치없는 제안까지 나왔다. 한결같이 부안의 발전을 위해서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다. 이런 사업을 벌이면 부안에 돈이 쏟아져 들어오고 사람도 넘쳐날 테니 군민들은 더 행복해질 거라는 논리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의 주장은 ‘개발’이지 ‘발전’이 아니다. 이 두 개념을 혼동해서는 일을 그르치기 십상이다.
개발의 대표적인 예는 아다시피 새만금이다. 새만금을 막고 나면 부안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주민들은 돈방석에 앉는 줄 알았다. 실제로 30년 동안 물막이 공사로, 매립 비용으로, 또 수질 개선 명목으로 수십조 원의 돈이 들어갔으니, 부안은 지금쯤 천지개벽에 상전벽해가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어떤가. 돈방석은커녕 그 비옥한 갯벌을 잃어버린 데다 비산먼지로 주민들은 속병이 날 지경이다.
기업 유치도 마찬가지다. 부안에는 년 매출이 3000억 원에 육박하는 중견기업 참프레가 이미 들어와 있다. 하지만 이 기업을 유치한 뒤 정작 우리 군민들에게 어떤 실질적인 혜택이 돌아갔는지 묻고 싶다. 오히려 읍민들은 악취 때문에 죽겠다고 아우성이지 않은가. 대부분의 지자체가 헐값 분양 등 온갖 특혜를 제공하면서 추진하는 맹목적인 기업유치로 인해 주민이 낸 아까운 세금만 축내고 있는 셈이다.
국가 예산을 많이 확보하면 무조건 좋다는 생각도 잘못됐다. 우리 군 예산은 이미 인구 5만 5000명의 작은 부안이 맵짜게 살림을 하면 부족하지 않을 만큼은 된다. 문제는 이 돈을 어디에 쓰느냐다. 도로공사 하고 주차장 만들고 조형물이나 세우고 나무 심는 사업으로 탕진한다면 토호자본가와 토건족의 배만 불릴 뿐이다.
이걸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파트가 즐비하게 솟아오르고 인구가 늘고 관광객이 북적인다고 우리 보통사람들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제보다 오늘이 더 행복해졌다고 말 할 수 있을까. 개발은 인간을 대상화하며, 이는 곧 종속화 내지 노예화를 뜻한다. 이런 환경에서는 우리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살 수 없다.
이에 반해 발전은 내재적 요소의 개화, 즉 밖에서 뭔가 근사해 보이는 것을 들여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을 화려하게 꽃피우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의미의 발전은 인간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그 자체가 목표가 된다.
일본의 다카야마 시를 보자. 인구 8만에 불과한 이 작은 고장에 지난해 460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면서 1조원 가까운 돈을 썼다. 숙박객만 51만 명이었다고 한다. 뭔가 획기적인 볼거리와 놀거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일본의 옛 분위기를 잘 보전해 오고 있다는 것 외에는 그저 한적한 시골 마을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마을에 열광하며 줄을 서는 것일까.
다카야마는 2005년 ‘다카야마시, 누구나 좋은 마을 만들기’라는 이름의 조례를 제정하고, 장애가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개인의 상황이나 형편과 상관없이 누구나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데 부족함이 없는 마을 만들기에 나선다. 주민들은 시내 상점에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도록 턱을 없앴고, 시각장애인 점자 블럭에 열선을 설치해 눈이 오면 녹게 했다. 우수관의 구멍을 작게 만들어 휠체어나 유모차 사용에 불편함이 없도록 했고, 화장실도 어린이와 고령자, 장애인까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다목적 화장실로 바꿨다. 이웃의 어려움에 공감하지 않는다면 나올 수 없는 정책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마음을 모아 협력하기 시작했고, 서로 돕고 나누는 미덕이 지역 정서로 자리 잡았다. 마을에 돈이 들어오면서부터는 후대의 번영과 이익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서 개발을 억제하는 유연한 사고방식을 유지했다.
이들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개발 위주의 토목공사를 벌이지도 않았고, 조악하고 촌스럽게 보이는 랜드마크를 세우지도 않았다. 단지 ‘우리끼리 잘 살기’ 위한 걸음을 떼었을 뿐인데 외부 사람들은 바로 그 ‘정다운 마을’에 열광한 것이다.
세계적인 시골 관광지들이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탄생했다. 마을사람들끼리 즐기려 했던 소박한 축제가, 몇몇 이웃이 모여 만든 수제 와인이, 겨우내 두고 먹으려고 만든 투박한 치즈가 입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원래 가지고 있는 자원을 이용해 스스로 잘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인데, 도시라는 악다구니 소굴에서 특징 없이 하루하루 살아오던 사람들의 부러움을 자극한 것이다.
부안에는 너른 들과 수려한 변산과 노을 고운 바다가 있다. 우리는 질리도록 봐 왔기 때문에 너무도 흔한 것들이지만 외부인들에게는 새롭고 매혹적일 수 있다. 어린 시절, 고무신 바람으로 변산을 누비다 고사포에서 헤엄을 치고 집으로 돌아갈 즈음 서쪽 하늘에 꽃불 놓듯 달아오르던 그 노을은 기억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처럼 눈 크게 뜨고 살펴보면 부안에 자원은 넘쳐난다. 서울이니 워싱턴이니 어디 부안에 비길까. 다만 지금까지 우리는 자원의 가치를 보는 지혜를 갖지 못했고, 우리가 사는 고장에 대한 진정한 사랑도 없었다. 그러니 변산과 바다와 노을이 꽃을 피울 수 없었다.
그래서 답답하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는데 지역에선 담론이 사라지고 토론과 소통이 긴긴 겨울잠에 빠져 있다. 분열을 부추겨 그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취하려는 세력이 개발논리를 설파하고 다닌다. 행정은 과거의 정책을 맹목적으로 답습하고 일부 주민은 몇 푼 보조금에 목을 맬지언정 진정한 의미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다. 이 모두가 철학 부재에 원인이 있다. 이런 현실과 마주 할 때면 물고문이라도 당하듯 가슴이 답답해 온다.
이제 정치가 지역에 맞는 분명한 철학을 정립하고, 이를 주민과 공유하고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주민들이 상상력을 펼칠 마당을 마련하고 서로 협동하고 연대하는 조직이 이를 구체화하는 선순환을 이뤄내야 한다. 그래서 경제적 자립은 물론, 우리만의 문화적 고유성과 생태적 만족감을 회복해야 한다. 그게 진정한 의미의 발전이다. 그러지 않을 거면,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말자. 후대에 욕이라도 먹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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