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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김진배가 만난사람 22> 자존과 긍지로 산 신현동 (辛炫同) 법무사
자기대로 떳떳하게 살아온 깡끼가 넘치는 신현동 선생의 표정 ⓒ장정숙

법원 말단부터 등기소장 집행관까지

남의 1년 일을 3년 걸려서라도 해내다

서울 영등포 지방법원 왼쪽 3층 건물 아래층 기둥에 세로 글씨 한글로 쓴 ‘법무사 신현동 사무소’ 간판이 걸려 있다. 아침 9시반 이면 어김없이 출근하고 오후 6시면 미련 없이 퇴근한다. 손님이 붐빈다 해서 일찍 나오거나 늦게 퇴근하지 하지 않는다. 점심시간은 낮 12시부터 오후 1시 반까지란다.

뼈 깎아 만든 얻은 공직

요즘 엄청난 불경긴데 신 선생 하시는 일에도 영향이 있겠지요.
“부동산 거래든지 법원관계 일이 이렇게 확 줄어든 적이 없었어요. 이거 이러다가는 여직원 월급 줄 일이나 집세 줄 일이 신경 쓰여요. 내 밥벌이는 고사하고……”
-법무사도 한 20여 년 하시고 이제 팔순도 지내셨으니 슬슬 문을 닫든지 해서 마음의 부담이라도 덜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더러 그렇게 권하는 친구도 있고 어쩌다 그럴까 하고 솔깃할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쪽으로 마음이 내키지 않아요”
-왜요?
“글쎄요. 30여 년을 법원 행정 일을 보았어요. 그 다음 놀기가 뭣하고 많은 친구들이 법무사 간판을 걸었어요. 꼭 밥벌이로 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봉사하겠다는 그런 마음으로?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내가 나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 내가 법원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렇다면 이제 나라나 법원에 내 몸과 지식을 조금이나마 갚아야 하는 것이 도리 아닌가, 사명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그렇다면 큰 비용을 거기에 꼴아 박거나 크게 골치 아프지 않다면 견디어야 하는 것이 도리 아닌가, 아직 몸을 굴릴 만한데 문을 닫을 수야 있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세상에 이런 공직자가 있었나, ‘노예근성’이라고 피식피식 비웃을지도  모른다. 은혜를 갚는다거나 책임을 느낀다거나 그런 거창한 말이 아니라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하다니, 흔한 말로 뼈 빠지게 일하고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았을 뿐인데. ‘서기 보’에서 발을 떼어 수 천 개의 계단을 터벅터벅 올라가 ‘서기관’에 이르기까지 30년이 걸렸다. 어떻게 얻은 공직인데 더운 밥, 찬밥을 가리겠느냐는 투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을 수야 없다는 자신에 대한 존엄이오, 긍지 라 할까.
 
 

넥타이의 맺음이나 신발끈 하나도 깔끔한 신 법무사

야간대학 가는데 3년 걸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18세의 소년 신현동(1940-  ) 이 부안 동진면 집을 뛰쳐 나와 서울로 향한 것은 오직 대학에 가기 위해서였다. 집안 형편으로는 전주든 익산이든 어느 대학도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거기서 무슨 고생을 하든지 고학해서 들어 갈만한 대학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가기만 하면 피나는 생존의 경쟁터가 있다. 거기서 이기면 학교도 가고 취직도 하고 성공도 할 수 있다. 소년의 가슴은 뛰었다. 서울 변두리 산 중턱에 무허가 집을 짓고 혼자 사는 숙부를 찾아 갔다.
“내가 헌 리어카 하나 사 줄 테니 군밤 장사 할래?”
하아, 숙부도 서울 사람 다 됐구나, 나를 당장 쫓아내겠다는 말이구나 싶어 두말 않고 그대로 따랐다. 밤 한 말 값과 밤을 구울 연탄 몇 장 값을 주며 자세하게 장사 요령을 알려 주셨다. 서울 한복판 시청 남쪽 녹지원에 리어카를 받치고 영업을 시작 했다. 말쑥하게 차린 남학생 너댓이 몰려들어 굽기도 바쁜 판에 주워 먹었다. “얼마요?” 묻지도 않고 “이거 밖에 없어”하고 튀었다.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배고픈 어른들도 촌놈 다루는 수법은 이들 학생들과 다름 없었다. 군밤장수는 일주일 만에 거덜 나고 말았다.
그 며칠 뒤 어느 드라이클리닝 회사의 배달 보조로 들어갔다. 짐자전거에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큰 덩치의 세탁물을 싣고 공장과 여러 세탁소를 연결하는 일이었다. 한 1년 세탁소에서 영업을 배우고 나서 조그만 집을 세내어 세탁소를 운영했다. 돈 버는 재미에 밥 해 먹는 것도 잊었다. 어떻게든지 벌어서 대학에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가 어렸을 때 익상리 신씨네 집을 ‘양조장 집’, ‘술 회사 집’이라고 불렀다. 면 소재지 봉황리와 계화도 두 군데에 주(酒)장이 있었다. 동진면장을 지낸 그의 할아버지는 1948년 제헌 국회의원에 출마 할 정도 였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러한 과거는 그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고스란히 상처로 얼룩졌다.
    
남이야 어떻게 보든

그 동안 악의악식으로 모은 돈으로 대학 야간부의 문을 두드렸다. 건국대학 2부 정치학부 법과였다. 말쑥한 교복에 베레모 스타일의 교모를 쓰고 뺏지를 붙였다. 학교가 낙원동 지금 천도교 교당 바로 옆에 있어 가까운 동숭동에 서울대 문리대와 법대 의대 등이 물려 있고 명륜동에 성균관대가 있어 교복만 언뜻 보면 어느 대학인지 구별 하기 어려웠다. 모자와 뺏지를 보고서야 부러움과 멸시가 작동한다. 더러 모자를 구겨서 뒤 포켓에 쑤셔 넣거나 아예 뺏지를 떼는 동료들이 있었다. 신현동은 당당한 자세였다. 이 모자, 이 뺏지 하나 너희들 것과 안 바꾼다. 이런 뱃심이었다. 버릴 수 없는 것이 자존심 아닌가, 지켜야 할 것이 긍지 아닌가, 하는.
2부 대학 시절, 낮에는 한 푼이라도 벌어야 밥을 먹고 등록금을 모을 수 있다. 신현동은 새벽 6시 집을 나와 오후 4시 까지 꼬박 일을 했다. 집에 돌아와 작업복을 교복으로 갈아입고 학교에 가면 밤 10시 40분에야 끝난다. 밥통에 넣어 둔 밥 한 두 공기 들고 나면 곯아 떨어진다. 대학 3학년 때 제약회사 광고를 보고 응시했더니 통지가 왔다. ‘쥐잡기 약 회사’였다. 그것도 한 때, 6개월이 지났을까 회사가 부도가 났다. 취직과 실직이 1년에도 몇 번씩 되풀이 되었다.
가까스로 대학을 나오자 군대 가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동안을 허송하기 아까워 법무부 교정직 시험에 수석합격. 대전교도소 교도보로 발령을 받았다. 이 때 교도소장이 ‘엘리트’라며 이 초년생을 크게 칭찬했다. 얼마 뒤 교도소 후배 한 사람이 자기 누나를 소개하며 ‘매부매부’하는 바람에 서로 얼굴 한번 못 보고 군대 가기 얼마 전 결혼했다. 신부는 춘천에서 미장원 일을 하고 있었다. 이름은 서민영(徐玟伶). 병장으로 만기 제대하여 대전교도소로 복직하자 법원공무원(법원서기보)시험에 합격, 서울민사 지방법원 광주등기소를 초임으로 1999년 12월 31일 30년의 법원공직을 마친다. 그 뒤 지금까지 29년 동안 서울남부지방법원 소속 법무사로 다람쥐 챗바퀴 돌 듯 법원 언저리를 돌고 있다. 대전교도소 교도보 1년 남짓을 합치면 꼬박 51년을 ‘국가’와 함께 있은 셈이다.

새 신랑 같은 남편 신현동(80) 옆에 긴 비녀를 꽂은 부인 서문영 여사(73)

어떻게 얻은 공직인데! 몸에 벤 부정 배격

법원은 권력기관이다. 자리가 높고 낮고 간에 넌지시 부정을 눈 감도록 방치하기도 하고 유혹의 손길이 뻗히기도 했다. 상사라 해서 다 청렴결백한 것만도 아니요, 부하라 해서 법대로 하는 것만도 아니었다. 상사로 부터는 꽉 막힌 사람으로 무시당하기도 하고 부하로 부터는 도리어 모략중상으로 괴롭힘을 당한 때도 있었다.
-그런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법원이란 곳은 우리가 ‘법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어요. 훌륭한 법관, 훌륭한 법원행정관이 많았어요. 그 분위기랄까 그런게 참 좋게 보였어요. 또 복도 있었겠지요. 한 가지 제가 느끼는 것은 사람에 대한 평판이 아주 중요합디다. 그 사람은 절대로 그럴 사람 아니다 는 평판이 나면 자기 자신이 흙탕물에 물들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돼요. 자존심이랄까 책임의식이랄까 긍지랄까.”
법원공직에서 법무사로 물러나 웬만큼 시간과 경제에 여유가 생기자 그는 고향과 모교에 대한 관심을 쏟았다. 삼남중학교 동창회와 장학회를 만들어 책임을 맡고 건국대 동기회의 회장을 맡아 고생을 같이 했던 친구들과 정을 나누었다. 재경 부안향우회에도 부지런히 참여했다. 며칠 전 서울 서초동 법조 타운의 지하 예식장에서 팔순 자축연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노래를 불렀다. 한 때 가수 학원에 다니며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들어서려던 그의 마이크 잡는 자세나 끄덕거리는 목이 왕년의 솜씨를 보여 주었다. 그는 ‘잃어버린 30년’, ‘마지막 잎새’, ‘미워도 다시 한번’을 잇달아 뽑아댔다. 떳떳하게 살아온 한 평생을 보아란 듯이. 슬하에 2남 1녀.

 

김진배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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