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남은 효자 효부 석승인 부부의 미소. 석 씨는 곡식도 패션을 좋아한다며 일할 때도 울긋불긋한 옷을 입곤 한다.

귀농 귀촌인 석승인(石承仁) 부부

치매의 정글을 어떻게 헤쳐 갈까

아버지는 가난했다. 청년방위대로 변산 아래 마을 고지를 지키고 휴전이 되었는데도 제2국민병으로 끌려가 7년을 썩었다. 그래도 큰 불만은 없었다. 하라는 대로만 하면 옷도 주고 밥도 주었으니까,
남들은 돈을 찔러주고 빽을 써서라도 하루 빨리 제대하는 것이 소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제대한들 돌아갈 집이 있나 논밭 한 뙈기가 있나, 거기에서도 던져지다시피 해서 부안으로 돌아왔다. 나이 서른이 지나 열 살 밑인 어머니와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농사 지을 땅이 없어도 자식 농사만은 대풍이어서 20년 동안에 아들만 내리 8형제를 두었다. 장남으로 태어난 사람이 석승인(石承仁, 1960~)이다.
태어나기는 하서라는데 초등학교는 주산에서 나왔다. 철 들고 나서 이사 다닌 곳만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건강하고 부지런하여 남의 일이라도 다니며 ‘서로 빼앗아가다시피’ 일을 시켰지만 그런 기회는 어린 자식에게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어느 날 그는 배를 움켜쥐고 서울로 떠났다. 서울 가면 무슨 험한 일을 하더라도 이를 악물고 참기만 하면 밥은 먹는다는 것이었다. 잘 하면 성공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성공’ ‘출세’ 얼마나 철모르는 어린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말인가! 서울이 신물 나고 험한 곳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데는 몇 년이 걸렸고 그거 알고 나서도 막상 다른 선택이 없었다. 부모는 있어도 형제는 우굴해도 돌아갈 고향은  없었다. 안해 본 일이 없었다. 장갑 장사도 하고 타올 파는 기획사도 해보고. 96년 IMF 때는 그것 마자 거덜 나고. 한때는 와플 과자 대리점도 하고 총판도 했다. 서울 성동구에서.

우리 시대 마지막 효자 효부
-38년 동안이나 객지에 있다가 고향에 돌아오셨다는데 어떻게 돼서 오시게 됐습니까, 하시는 사업도 웬만큼 토대를 닦았다는데.
“아버님 건강이 전과 같지 않았어요. 어머님은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때 고향에 온 우리 형제들 가족들을 보면 대견해 하면서도 아버님이 언제까지 일 하시게 될지 모르겠다며 걱정하세요. 우리 형제들은 참 자립심이 강해요. 웬만큼 크면 다 밖으로 나갔어요. 형제들끼리도 저 대로 나가서 벌어먹으면서 하나씩 데리고 들어오고 애들이 생기고 하니 우리 부모님들이 얼마나 좋아 하셨겠어요. 하지만 동생들 아무도 자기가 부모님 모시겠다고 운을 떼지 않아요. 부모님은 너희들대로 살아라 하시면서 은근히 부안 하서 백련리(금산 마을)에 농사 짓고 살기를 바라면서도 말입니다. 부모님은 어찌나 부지런하신지 누군가 밭을 묵히는 듯 하면 당신이 벌겠다며 세로 얻었대요. 야산 한쪽도 개간해서 여기 저기 뭔가 심어서 크는 재미로 사셨어요.”
-그래서요.
“저대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저 혼자 내려올 수는 없지 않겠어요. 저 사람, 저와 함께 서울에서 온갖 고생 다하며 토대를 이룬 저 사람, 아내 말입니다. 내가 장남이니 우선 내 혼자라도 내려가서 부모님 농사일을 거들어야겠다고 조심조심 눈치를 살피며 말했더니 당신이 뭘 알아서 혼자 간다고 하느냐며 따라 나섰어요. 참 눈물이 핑 돕디다. 저 사람이 나를 그렇게 아끼는구나, 시집에서 부모님 모시면서 사랑을 받아 본 일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효심이 나올까.”
- 부인은 농사일을 압니까?
“알기는요, 저는 초보고 저 사람은 왕초보지요.
-허허! 초보 왕초보의 효자 효부 행렬, 귀경 거리였겠네!
부랴 부랴 서울 살림과 사업체를 정히하는 데 서너 달이 걸렸다. 농사철을 앞두고 내려와야 하기 때문에 기획사 운영을 여직원에게 맡기고 귀농 귀촌의 길로 들어섰다. 귀농 귀촌 절차에 앞서 ‘요양보호사’ 자격부터 땄다. 농사를 가업처럼 삼으려면 농사 1세의 창업주가 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하기 때문이다.  아버님의 건강을 보살피는 일이 급한 일 이었다.
-그때 부보님 연세는?
“2012년 4월이니까 아버님이 84세, 어머님이 74세 때 였어요. 제 나이 52세, 집사람이 51세던가.
-참 대단하시네요. 지금도 그런 장한 부부가 있다니. 그런데 조금 궁금한 게 효도도 좋지만 그렇게 급히 내려와야 할 무슨 다른 사정이라도 있었는지?
“아 참. 이런 일이 있었어요. 아버님이나 어머님은 어찌나 부지런하신지 새벽 네시든 다섯시든 눈만 뜨면 밭으로 나가셨대요. 깬 사람은 나가고 자는 사람은 그대로 자라고 놓아두고. 옆에 누워있던 아버지가 안 보이면 어머니는 이 영반이 이 밭뙈기로 가셨나, 저 밭뙈기로 가셨나 찾아 나셨대요. 그런데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요. 걱정이 되어 여기 저기 개간한 야산 언저리를 더투다가(더듬다가) 바닥에 누워 있는 아버지를 발견하고서 놀라 집에 와서 물 한 주전자와 활명수 두어 개 들고 가서 자시게 해서 겨우 집으로 오셨대요. 놀라서 읍내 보건소에 가서 진찰했더니 의사가 하는 말이 괜찮다며 80 노인이 왜 새벽부터 일 하냐며 자식들은 뭐 해요 하드래요. 그 말을 듣고 제가 결심했어요. 돈 벌어서 부모님 편안하게 해드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부모님 하시는 일을 오래 하실 수 있도록 거들어 드리는 일이 아닌가 한 거지요.”
 
마늘 1만평 심어 100톤 목표  
마침 정부는 급격한 농촌 인구의 감소, 특히 고령화에 따른 대책으로 농사 지을 줄 아는 사람은 농촌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귀농 귀촌’ 정책을 펴고 있었다. 농사 짓는 방식도 그 전 세대와는 크게 달라졌다. 기계 영농, 하우스 영농에 집중했다.
“겁도 없이 한꺼번에 3억 4,000만 원을 투자했어요. 그 가운데 1억 6,000만 원은 연리 2%, 5년 거치 10년 균등 상환이지요. 올해부터 1,600만원과 1억 6,000의 이자 320만원을 갚아야 해요. 정부로서는 큰 혜택을 주려는 것이지만 실상은 이 농사라는 게 부지런히 한다고 해서 수지가 맞는 건 아니거든요. 흉년이 들면 더 말할 것이 없고 어쩌다 운 좋게 풍년이 들면 값이 떨어지고…… 가격 예측이 어려워요“
-그래 올해는 무슨 농사를 준비하고 있습니까.
“마늘과 양파 농사를 지어보려고 합니다. 만평의 땅에 마늘 4천평, 양파 4천평을 심으려 합니다. 또 300평에 고추 2,800주를 심고 감자도 한 500평 심고 콩을 2,000평 심으려 합니다. 아무래도 전 국민이 먹는 먹거리를 심는 것이 가격 변동을 덜 타니까요.”
마침 밭 한 쪽에 아내와 함께 마늘 건조장을 손수 짓고 있었다. 5미터 X 8미터. 이만한 시설이면 100톤쯤은 건조시켜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몇 년 전에 금산리 집에서 읍내 가는 쪽으로 10키로 떨어진 삼간평 논 2,400평에 하우스 8동을 지었다. 수익이 좋다는 ‘세발 머위’를 심었다. 첫해는 그런대로 괜찮더니 다음 해 이 작물의 생장이 시원치 않았다. 하얗게 땅에서 소금기가 올라왔다. 이럴 수가 있나. 주인의 실망은 말할 것도 없고 기술지도를 하는 군 기술센타가 당황했다. 그렇다고 논밭 전체의 지질을 조사하기는 실상 불가능 하다. 아무리 70년~80년 전에 바다를 막은 간척지라지만 벼 심고 보리 심던 땅이다.

농민은 갈 때도 처참하게 가야 하는가
귀농할 때는 아버지의 노후가 걱정이어서 고향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은 홀로 계신 어머니가 더 걱정이다.
어머니 김정순(金貞順) 씨는 어느 날 뇌경색으로 집에서 쓰러졌다. 급히 전북대 병원으로 모시고 갔는데 정작 병원에서는 수술은커녕 눕혀 놓을 침상 하나 없어 큰 아들이 서울에서 달려올 때 까지도 복도에 의식불명인 채 방치되어 있었다. 부랴부랴 사설 앰블런스를 불러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농민은 죽기 전에 송장 취급을 받는 사회, 남의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 석금성은 술 고래요, 연신 담배를 물고 계셨다. 큰 아들 석승인은 술은 막걸리 몇 잔이오, 담배는 한 갑에 2,500원 받던 것을 4,000원인가로 올릴 때 끊었다고 한다.
“이제 63년생, 베이비 붐 시대가 노인 시대로 들어가는 길목입니다. 누가 이 노인들을 보살필 겁니까. 우리 부안에는 4,000명 안팎의 귀농 귀촌인이 농촌 노동을 보충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도 어느새 노인 세대의 길목에 들어섰습니다. 국민의 먹거리를 담당하는 농업인들도 나라가 월급을 주어야 한다는 말 못 들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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