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깃배는 화려한 깃발을 달았다. 정월에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를 앞두고 있다. 배가 정박한 장소는 계화도의 하리 포구로 오른쪽에 보이는 둑은 계화도와 돈지를 연결하는 물막이 둑이다. 하얗게 보이는 건물은 하리에 있는 어판장이다. 어판장을 지나 산 밑 왼쪽 길을 걸으면 살금 마을이 나오고 고개를 살짝 넘으면 장자울에 닿는다. 배의 모습이 바닷물에 비치면서 요술거울처럼 잔물결에 흔들린다. 하루해가 저물어 가는 석양빛이 강하게 비치고 깃발은 서풍에 날린다. 바람이 좀 불지만 곧 날씨는 좋을 것이라고 그림은 이야기 한다. 계화산 위 하늘에는 두 종류의 구름이 하늘을 가르고 있는데 서쪽 뭉게구름이 동쪽의 비구름을 하늬바람을 타고 밀어낼 것이다. 계화도 출신의 서양화가 김형태의 1993년 그림이다.
  계화도가 섬이었을 때, 육지로 나갈 때는 배를 이용했다. 중리 포구에서 거룻배를 타고 50여 미터를 건넌 후에는 썰물 때를 이용해서 맨발로 창북리까지 걸어갔다. 안개 낀 날에는 잘못 길을 들면 어려워질 수 있으니 참나무 말뚝을 박아놓고 이 말정을 보고 걸어갔다. 갱변 끝의 창북리에는 갈대밭이 보이고 벌막이 있는 염전에서 염부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갯벌을 건너 이곳에 와서야 양말도 신고 신발도 갈아 신었다. 이제 걸어서 부안읍에 가려면 당오초등학교 옆길로, 오거리 방죽을 지나면 뱀터 고개를 만난다. 뱀터 고개는 이름조차 오싹하고 해질녘이면 더 무서웠다. 등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이곳을 얼른 지나쳐 지너리 방죽과 한가매를 지나 성황산 중턱 길을 타고 돌아 부안에 닿을 수 있었다.
  부안에서 온 사람들이 계화도를 들어가려면 창북리에서 물때를 맞춰 걸어서 중리 포구 앞까지 간다. 계화도 앞의 포구는 항상 물이 있었기 때문에 손님들은 개 건너에서 거룻배의 뱃사공을 불러서 이용하였다. 1972년 3월 20일에는 계화도 거룻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계화도 사람 16명이 익사하기도 했다. 밀물 때는 계길호(界吉號)라는 이름의 통통배가 계화도와 돈지를 하루에 한번 씩 왕복한다. 이 배는 계화도 자체의 육성회에서 운영했다. 
  계화도 사람들은 봄가을 두 차례 계화도 앞바다의 장관(壯觀)을 보게 된다. 간재(艮齋)선생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전국에서 모인 제자들이 한얀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 여성이 신는 듯한 고무신을 신고 갯벌을 걸어오는 것이다. 마치 하얀 학들이 춤을 추며 걸어오는 듯한 신기한 모습이었다. 이들은 계화도가 보이는 곳에서 거룻배를 불러 중리 포구에 닿은 후에는 산기슭을 넘어 양지말로 걸어갔다.
  계화도 갯벌을 오가는 이야기는 이제 꿈같은 이야기가 되었다. 계화도 사람들의 삶터인 바다를 다 잃었기 때문이다. 논으로 이용한다는 명분으로 바다를 막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쌀이 남아도니 골프장으로, 카지노로, 태양광지역으로, 비행장으로, 바뀌는 명목이 언론에 오르내릴 때마다 계화도 사람들의 맘은 숯검댕이가 된다. 그럴려고 논보다 훨씬 경제 가치가 큰 갯벌을, 계화도 사람들의 삶터를 파괴했단 말인가. 
  김형태 화가의 어선 그림은 서풍을 받으면서 화려한 깃발을 힘차게 휘날린다.   ‘바다에서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고 고향 계화도를 향하여 저 깃발은 끝임 없이 외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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