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도가 부안으로 편입되기 전만 해도 계화도(界火島)는 부안을 대표하는 섬이었다. 어떤 이는 이 섬이 전라남도의 홍도(紅島)처럼 아름다웠노라고 필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줬다. 계화도 양지말에 살았던 간재는 섬의 아름다움을 계화십경(繼華十景)으로 얘기 했다. 물론 그의 관점이 중화(中華)라는 유학자의 관점에서 풀어가다 보니 자연스럽지는 못하다. 계화도는 섬의 기능을 잃으면서 그 아름다움도 함께 잃었다. 계화도는 군사정권의 식량증산이라는 구호와 함께 갯벌을 잃은 대표적인 곳이 되었다. 간척을 거쳐 새만금 공사가 진행되면서 계화도는 그나마 남아 있던 바다마저 잃었다. 섬의 개발을 앞두고 원주민 사이에는 찬반 의견이 치열했을 것이다. 돌아보면, 결국 바다라는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으니 이들의 삶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전부터 계화도에 관심을 가졌지만 생각만 앞서 갔지 자주 찾지는 못했다. 옛 신문을 검색해 보았다. 1913년 3월 매일신보 기사에는 계화도의 호수는 120, 인구는 남 303명 여 240명, 빈곤자가 다수이고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죽은 사람이 3명이었다. 기아에 처한 사람도 100 여명이라는 기사다. 3월이면 춘궁기이고 겨울에는 고기잡이도 쉽지 않으니 살아가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산과 바다로 이루어진 섬이라서 논밭이 극히 적어 식량부족에 시달렸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염병까지 섬에 창궐해서 그 참혹한 현실을 차마 보기 어려웠다. 이후에도 식량 때문에 궁핍한 사람들은 늘어나기만 했다. 계화도의 부자인 이승렬(李承烈)은 굶주리는 사람들 가정 54호에 백미와 보리를 나누어 주는 미담도 신문에 소개되었다.
매일신보 1934년 기사를 보니, 당시 140여 호에 인구는 500 여명이 섬에 거주한다고 했다. 거개가 어민이고 생활이 궁핍하고 교통이 극히 불편하여 문화의 혜택을 입을 여유가 없었다. 미래를 위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의 설치가 절실했다. 봄에 계화도의 유지와 청년들이 수차례 협의한 후에 600여원의 희사금을 모아 교육기관을 열었다. 부안 관내의 김판용(金判用)씨를 교사로 초빙하여 40여 아동을 모아 가르쳤다. 아침마다 재잘거리며 웃음꽃을 피우고 배움의 문턱을 드나드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골목을 채웠다.
이 교육기관은 ‘계화학원’으로 문맹퇴치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나 1936년에는 빈약한 재정으로 경영이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렵게 문을 연 배움 터를 닫을 수는 없었다. 마침 안서어업조합에서 한해 경비 500원씩을 지원하면서 교육기관의 역할을 지속 할 수 있었다. 이 학원이 언제까지 유지되었는지는 증언이 필요한 부분이다. 계화국민학교가 개교된 것은 1942년이니 그 후 계화학원이 초등학교로 흡수되었는지, 여전히 기능을 했는지는 앞으로 살펴야 할 지점이다.
열악한 환경의 섬에 살면서도 후세에게는 배움의 길을 열어줘야겠다는 계화도 사람들의 정성을 기억한다. 이런 뜻을 살려 계화도 사람들이 삶터가 처한 극한 현실을 잘 극복하여 섬의 기능과 이름 찾기를 희망한다. 부안 사람들도 해수유통을 포함하여 부안 갯벌을 살릴 일에 의견을 모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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