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지금 이 한반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벌써 20년 30년 전부터 우리 부안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들기 위해 호락질로 몸부림치며 너와 내가 손잡고 싸웠다.
자랑스런 부안의 얼굴이다.
그들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떳떳한 자세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지금 바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뻘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목표가 있다.
오늘을 백년으로 알고 오직 순간순간을 확실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연중기획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시작하며

 

은사 백문기 교수의 석상 앞에 선 김오성 씨. 화강석돌 안에 1미터 쯤의 관을 뚫어 선생의 뼈가루를 안치했다. ⓒ장정숙

 

돌을 떡 주무르듯 하는 신비의 열손가락

잉글랜드 런던에서 서쪽 웨일스 카디프로 고속도로가 뚫릴 때 웨일스 사람들은 한사코 개통을 반대했다. 해도야 있든 없든 뱃길을 훤하게 내어 죽이고 빼앗으며 동서 남쪽 할 것 없이 식민지를 확보하고 대영제국을 건설한 사람들이 용감하고 영악한 앵글로색슨이다. 그런데도 산을 깎고 다리를 놓아 물류를 뱃길처럼 내려는 새로운 야심에 웨일스 사람들이 반대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물류 혁명은 도시를 위한 것이지 변방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지방은 도시의 밥이며 문화의 예속을 재촉할 뿐이다. 이런 이유였다고 한다. 어떻든 유통혁명의 과실을 누가 더 따먹게 되느냐는 것을 두고 중앙의 논리가 그대로 먹혀 들어가지 않은 것은 우리로 보면 조금은 이상한 이야기로 들린다.
마침 설날 오전 기자가 조각가 김오성金五聖 선생을 만나러 금구원을 찾아갈 때 전에 구 도로로 가던 발길이 머리에 박혀 한동안 어리둥절하며 엉뚱하게도 영국 생각이 났다. 30번 국도가 격포항 밖으로 새로 뚫리고 큼직한 안내 표시판이 시선을 빼앗는 사이 ‘금구원’ 입구 표지는 ‘굽은 소나무’ 보듯 슬쩍 스치고 만다.

초대 작가의 화려한 귀향

-언제부터 이 조각공원에서 일하시게 됐습니까.
“1991년이니까 한 30년 가까이 되네요.” 
-나지막한 남향인데다 터가 아주 좋습니다. 이렇게 좋은 터를 어떻게 구했습니까.  “아버님 덕이지요. 제가 조각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거의 운명적인 거였어요. 해방 전에 이리 농림을 나오신 아버님은 6.25 얼마 뒤 부안농고 농업 실습선생을 잠깐  하신 외에는 어데 취직하지 않으시고 혼자서 땅을 개간하고 곡식을 심고 나무를 심으셨대요. 마침 1964년 3.1문화재단(제비표 시멘트)에서 주는 ‘농촌지도자상’을 받으셨어요. 그때는 누구다 누구다 하는 재벌들이 주는 큰 상이 없던 때여서 신문에서 아주 크게 써주었대요. 마침 박 대통령께서 이 소식을 보고 받고 국유지나 군유지 한쪽 원하는 곳 떼어주라고 지시해서 고향 변산을 희망, 여기 이곳에 몇 만평 임야를 확보 하셨대요. 땅을 고르고 흙을 나르는데 지금 같은 중기가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1톤짜리 트럭 한 대도 없었대요. 순전히 곡괭이와 삽, 지게로 져 나를 수밖에요. 겨우 초등학교를 나온 저도 가끔 이곳에 와서 거들어 드렸지만 도움이 되기는커녕 꺼슬럭거렸는지 탐탁하게 생각하시지 않았어요.”
-아, 그렇습니까. 저 수 십년 되어 보이는 큰 나무들은 거의 아버님께서 심으신 거겠군요. 물은 어떻게 확보하고?
“저 밑에 둠벙(조그만 연못)이 있었어요. 거기서 물 지개로 퍼 나르지만 거의 하늘만 바라보며 비오기만 기다리는 거겠지요.”
-전기로 퍼 올릴 수는 없었나요.                
“그때가 언젠데요. 전기로 말하면 단군시대지요. 허허!”
-어떻게 조각가의 길로 나가시게 됐습니까?              
“외지 중학교는커녕 그 근처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집안 형편이. 아버님께서 자식 공부시킬 걱정을 하시는 것 같지도 않고. 그래 마침 홍익대학 조각과 교수로 계시는 김경승(金景承) 선생님께 편지를 썼지요. 선생님이 아버님과 함께 예술부문 3.1문화상을 타셨거든요. 그래 당돌하게 우리 아버지가 누구인데 선생님 밑에서 심부름도 하고 일도 배우고 싶다고 했지요. 얼마 뒤에 선생님한테서 좋다는 답장이 와서 아버님께도 말씀드렸더니 좋아하세요.”

연인상을 바라보는 김오성작가 내외

김경승 문하에서 20년의 철저한 도제교육

조각가 김경승1915-1992은 당대 최고의 조각가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날린 사람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조각을 제대로 공부한 손꼽히는 동경미술학교 출신이다. 조각하면 홍익대학이오, 홍익대학 하면 김경승을 꼽을 만큼 한때 한국 조각계의 전설이었다. 광화문 네거리에 우뚝 선 충무공 동상이나 국회의사당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 수유리의 4.19 기년탑 등은 모두 김경승 작품이다. 큰 작품은 혼자서는 하기 어렵다. 더구나 동상처럼 세울 날짜를 정해놓고 하는 작업은 여러 사람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김군 대단해! 너 밖에 없다. 네가 한다 생각하고 일해라. 그래야 진짜 공부가 된다”
철저한 도제 교육이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부려먹으며 가르치면서도 독립을 시켜주지 않았다. 목조 개인전(1969 부평 미8군 에스컴), 불교 미술전(1972), 그 후 여러번 국전에 입선한 뒤 1974년 국전에 특선되고 1984년엔 마침내 ‘현대 미술 초대전’에 초대작가로 데뷔한다. 그의 손재주는 일찍부터 주변의 주목을 받았다. 서울 근교 부천의 미군부대에 근무할 때 전시회에 출품한 나무로 깎은 남성의 머리 조각은 사람들을 감탄케 했다고 한다. 그의 머리와 손에서 번득이는 지혜를 뽑아낸 최초의 스승은 뜻 밖에도 김형수(金炯洙)라는 부안 보안면의 유천초등학교 담임선생이었다. 이 분이 뒤에 곰소에 있는 변산수산중학 교감으로 계셨는데 데생을 가르쳐 주시고 미술 관계 책을 보여 주며 말하자면 ‘특별지도’를 해주며 보통 천재가 아니라 ‘래오나르드 다빈치 같은 천재’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칭찬도 하고 볼 일이다. 오늘의 김오성의 천재성은 시골의 한 이름 없는 교사에 의해 일찍 발견되었다.              
김오성은 자신의 이력에 ‘독학’으로 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대학 졸업장이나 그 흔한 석사 박사 ‘명예’가 없을 뿐 이 나라 최고의 조각 거장 밑에서 20년을 갈고 닦으며 보아란 듯이 그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세상에 내놓아 평가 받은 ‘작품’ 이상의 심사 기준이 어디 있겠는가. 조각이든 미술이든 이런 저런 응모 조건을 내걸어 패거리들 끼리 참여의 길을 독점하려는 작태와는 인연이 먼 사람이다.   
1966년부터 꼬박 20년 동안 서울 마포 신수동에 있는 김경승 선생 연구소에서 먹고 자며 눈만 뜨면 일이었다. 그때로 보면 최신장비로 돌을 쪼개고 깍고 다듬는 기술을 익혔고 집에서 숙식을 같이하는 조수나 조각과 학생들과 공동작업이었다.
제작에 참여한 동상만도 안중근 의사, 안창호 선생, 김유신 장군, 화랑 기마상, 월남 이상재, 용제 백락준, 성곡 김성곤, 전봉준 장군에서 이승만 박사에 이르기까지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김오성은 최고의 대학 최고의 장인 밑에서 20년 동안의 도제 수업으로 단련한 ‘돌의 연금술사’ 였다. ‘독학’이라 해서 ‘무학’으로 혼동할 일이 아니다. 흔히 간판이 사람의 능력을 저울질하는 잣대로 통용되는 사회에서 등록금만 내는 통하는 3류대학이나 연구소가 어디 붙었는지도 모르는 정체불명의 국내 국외의 ‘디프로마’다 학위증을 내세우는 부류와 같은 잣대로 잴 자리에 나란히 세워놓을 사람이 아니다.
1974년 국전 특선 이후 지금까지 45년 동안 김오성이 만든 크고 작은 작품은 80-90점에 이른다. 서울 한국은행 본점(작품 분수령) 금강 하구둑(청룡 백호) 임마누엘교회(예수님과 어린이) 대전 카이스트 상애동산(꿈꾸는 박새 섬 외) 정읍 충열사(선열상, 이충무공, 백정기 의사, 전봉준 장군 등) 정작 부안에는 그의 작품이 적다. 위도에 있는 훼리호 참사 위령탑, 매창공원 부사의 탑, 부안댐 망향탑, 개화 창북리의 기마상 정도다.
     
 

제작에 6년 걸린 한국 최초의 석조 천문도

서울대학 조각과의 백문기(白文基) 선생

초등하교 김형수 선생과 홍익대학 김경승 선생 외에 또 한분의 스승이 있다. 수년 동안 김오성의 전시 작품을 유심히 보아온 서울대학 조각과 교수 백문기(1927-2018) 선생이다. 국전심사위원이던 백 교수는 자기 제자 아닌 김오성을 현대미술관 초대 작가로 모셨다. 김오성은 감격했다. 그러나 정작 김경승 선생은 아쉽기 그지 없었다. ‘든든한 머슴’을 해방 시킬 수밖에 없었다. 기왕 초대작가로 발탁할 바에야 자기가 할 걸 그랬다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김오성은 백교수가 살아 있을 때 은사의 석상을 만들었다. 석상이 완성되는 것을 은사는 보지 못한 채 한줌의 재가 되어 바다에 뿌려졌다. 김오성은 부랴부랴 화장장에 달려가 ‘조그만 대롱’에 담을만한 유골을 얻어 왔다. 석상 위 20센치 쯤 홈을 파고 그 밑으로 1미터 쯤 역시 홈을 파서 그 안에 한줌의 재를 안치 했다. 은사의 유골이 오대양의 어느 바다를 떠돌든 이 부안 변산 땅 사랑하던 제자 오성이 만든 돌덩이 안에 고이 간직된 것은 가슴 뿌듯한 기연이다. 스승은 갔어도 스승을 위한 진혼곡은 위도가 보이는 격포 앞바다에 새워진 화강암 돌덩이 안에서 영혼을 달랜다. 김오성은 이 작업을 하며 언뜻 머리를 스쳤다. 불국사 석가탑을 보고 어찌나 감동을 받았는지 석굴암 가려던 예정을 그만 두었었다.
-언제 까지 일하실 것 같습니까
“글쎄요. 체력이 딸리면 못하니까. 한 5-6년 하면 좋은데…… 조그마한 건 한 10년 할 수도 있겠지요.
광복 전인 1945년 4월 27일 생. 그의 나이는 만으로 쳐도 75세다. 내년이면 칠순이다. 큰 작품이든 소품이든 일거리가 있는 사람은 복이다. 예술가, 조각가는 더욱  그렇다.     
40톤 되는 육중한 돌을 쪼개어 영혼을 불어 넣었던 김오성은 일찍이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부안사람에게 보이려 천문대를 만들었다. 조각공원 전국 1호가 금구원조각미술관이요, 사설 천문대 전국 1호가 금구원 천문대다. 한국 최초로 입체 석각천문도인 천구의방를 만든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부안 변산에 있다. 영국사람들은 셱스피어를 어찌나 미치게 좋아 했던지 인도와도 바꾸지 않는다고 했다. 채석강이나 직소폭포, 월명 낙조는 변산의 자랑이다. 하지만 그건 조물주의 조화다. 한 개인이 남긴 흔적 가운데 이만한 업적이 어디 또 있을까. 동서고금 위대한 예술은 보이는 사람에게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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