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지금 이 한반도에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벌써 20년 30년 전부터 우리 부안 땅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고장을 만들기 위해 호락질로 몸부림치며 너와 내가 손잡고 싸웠다.
자랑스런 부안의 얼굴이다.
그들의 성패와는 관계없이 그 떳떳한 자세와 꺾일 줄 모르는 의지는 지금 바로 우리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뻘떡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범상치 않은 목표가 있다.
오늘을 백년으로 알고 오직 순간순간을 확실한 자기 것으로 만든다.  

연중기획 <김진배가 만난 사람>을 시작하며

부안 상서 출신의 천도교 이정희 교령 ⓒ장정숙

변산 동쪽 자락 상서면 감교리 천도교 호암수도원은 6시 훨씬 전인데도 어둠에 쌓여 있었다. 수도원 입구 정면에 흔히 보는 절의 대웅전 같은 기와집은 문이 잠겨 있고 왼쪽으로 사무실인 듯한 건물에도 인기척이 없다. 이 사무실 옆에 콘테이너를 붙여놓은 듯한 허름한 집을 맴돌며 “선생님 계십니까?” 하며 입구 한 문을 두들겼다. 이윽고 안에서 주인이 ‘뜬금없이’ 찾아온 손님에 어리둥절하며 누구냐에 앞서 ‘무슨 일이냐’ 부터 물었다. ‘참 별사람 다 본다’는 그런 심란한 표정으로. 호암수도원 원장 정태수(鄭泰洙 67세) 선생은 이렇게 만났다.

“원장님은 서울 계시지요. 저는 잠깐 여기 와 있는 사람이고...”
-원장님은 누구시지요.
“교령님이십니다.”
-교령님 존함은 어떻게 되시는지?
“이정희 원장님 이십니다. 바를 정자, 빛날 희자, 박대통령 함자와 같지요. 성은 다르지만...”
-교령님 언제쯤 뵐 수 있겠는지 내일이라도 여쭈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내일까지 갈 거 뭐 있어요. 지금 바로 제가 여쭈어 보지요”
그 자리에서 전화통 다이얼을 돌리더니 핸드폰을 놓고 출타하셨다는 말이다.
시골 조그만 수도원의 원장이 그 종교의 수장과 직접 통화한다? 정작 교령과의 약속 시간은 부안군청 문화관광과 최연곤 과장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최 과장도 바로 교령과 통했다고 한다. 직통이다. 교주가 밥을 주나, 교리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나, 몇 시간 동안에 보고 듣고 겪은 천도교는 내 머리를 철퇴로 때리고 있었다.          
  
진짜 평등 
“천도교와 부안과는 이름부터 인연이 있습니다. 천도교에서는 보국안민 輔國安民 이라고 하지요. 부안은 부국안민 扶國安民 이지요.  나라를 돕는 일이나 나라가 넘어지지 않도록 붙드는 일이나 비슷하지 않습니까. 우리 어렸을 때 어른들이 말씀 하셨어요. 부안에는 ‘삼불입’(三不入)이란 말이 있다고 했어요.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 먹물 든 사람은 들어올 곳이 못 된다는 거지요.”
   
동학이나 천도교 쪽에서 전해오는 말이 아닌가 싶다. 부안이라 해서 다른 땅과 뚝 떨어진 세상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그 좋은 돈이나 권력 학벌이나 문벌이 중시 되지 않았겠는가. 만민 평등을 내세운 천도교의 이념과 이상을 이 부안 땅에서나마 실현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이런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서울 경원동 천도교 총본부인 수운회관 9층은 2019년을 맞아 부쩍 분주해졌다. 3.1운동 100주년이자 상해임시정부 100주년을 맞는 해이기 때문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지금처럼 빨리 돌아가는 격동 속에서 정부는 아예 이 100년을 맞이하기 위해 생겨난 것처럼 온갖 거창한 행사를 준비 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횃불을 든 사람이 전라도 정읍의 전봉준 장군이오, 3.1독립선언의 주창자가 천도교 접주 손병희 선생이다. 1884(갑오)년과 1919(기미)년이  왕정의 쇄신과 외세의 배격, 식민통치로 부터의 독립을 위한 민중, 민족의 항쟁이었다면 오늘 2019년의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100 주년은 어떤 역사성을 지닌 것이어야 할까, 

서울 경운동에 있는 천도교 수운회관, 3.1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자리다

부안은 천도교 성지
경운동 천도교 총본부는 100년 전 보성사 자리다. 이 건물 9층에 천도교 교령 방. 서너평 됨직한 비서실을 거쳐 가장 오래된 민족종교의 총본산 천도교 교령의 방이 있다. 10여 평 되는 방, 아주 검소하다. 이런 저런 장식품이나 표어, 사진들이 손님의 눈을 쏠리게 하지 않는다. 교령님 앉은 자리 앞에 좌우 양쪽으로 세 개의 의자가 놓여있다. 나는 명함을 드려 인사했다. 주인도 내게 명함을 주시면서 한마디 하셨다.

“뵙기는 처음입니다만 저는 김 의원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상서 감다리(감교리)가 고향입니다. 원촌(내동) 김규성 선생님 집이 저희 외가집이고.”                
“아, 그렇습니까?”
몰라 뵌 것이 어찌 죄스러운지 이러고 저러고 변명할 것 없이 화제를 돌렸다.
-천도교와는 어떤 인연으로 이런 최고의 자리까지 책임을 맡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글쎄요, 총회에서 선거로 뽑습니다. 입후보도 하고 선거운동도 합니다. 어떻든 3년 전에 이런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됐습니다.”
-마침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큰 일 많이 하시면 연임되시겠습니다.
“단임젭니다. 임기는 3년이지요. 어떻든 이 경사스런 100년 행사를 제가 주관하게 됐으니 영광이지요. 다들 복이 많다고 합니다.”
-천도교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영남세가 대단하다고 듣고 있는데 어떻게 약세인 전라도, 더구나 전라도 치고도 바닷가 변방 출신으로 당선 되셨는지?
“물으시니까 말씀드리는데 우리 천도교는 책임을 맡기는 많은 자리를 선거로 뽑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지역적으로 보면 약세였지요. 영남대 호남의 대의원 비율은 7대 1이나 6대 1정도나 될까 그랬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천도교는 아주 사해평등 아닙니까,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역 할 것 없이 철저하게 평등이지요. 차별이나 배타 의식을 없애자는 것이지요. 우리 천도교 최고의 영도자를 뽑는데도 이런 우리 천도교의 기본 이념이 우리 대의원들의 가슴에 녹아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포대신앙
이정희 교령은 ‘포대 신앙’이다. 천도교는 일찍이 부안 땅에 터를 잡았다. 읍내가 아니라 상서면의 애곡리(쑥실, 행정구역으로는 용서리)였다. 아버지 이영철은 일짝부터 학산 정갑수 (鶴山 丁甲秀)의 문하로 들어갔다. 학산은 동학의 부안교구를 창설한 김낙철 선생으로부터 일찍부터 감화를 받아 그의 사위가 된 전설적인 인물이다. 1894년의 동학혁명에서 의병투쟁을 거쳐 3.1운동에 이르는 반봉건 자주 독립운동의 핵은 바로 이 변산 동쪽 숙실과 감다리를 빼고 말하기 어렵다. 좁은 지역을 떠나 전국적인 천도교 역사로 보면 이교령은 ‘포대신앙’에 ‘진골’인 셈이다.
김낙철 선생의 항일 의병투쟁의 공적이 뒤늦게야 알려져 얼마 전에야 어설프게나마 감교리 국도변에 선생의 공적비가 세워진 것은 늦게나마 다행이 아니라 부끄럽기 이를 데 없다. 학산 선생의 경우는 아주 황무지다. 역사를 알아야 기억하지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판에 무슨 기억이 있겠는가. 학산의 주변에는 전설만이 널려 있다.
천도교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가 순교하고 2대 교주 해월(海月) 이 부안 땅에 와서 한 말이 있다고 한다. “도가 부안에서 꽃이 피고 부안에서 열매를 맺으리라.”
부안의 천도교는 연면하게 맥을 이어왔다. 왜적의 총칼 앞에서 결연히 무장투쟁을 한 용암(龍菴) 김낙철 선생에 이어 학산(鶴山) 정갑수, 해운(海雲) 박기중, 정암(靜菴) 이영철에 이어 호암(湖菴) 이정희 교령으로 호남도맥을 이어왔다. 이 교령은 자랑스런 부안 포(包)에 교적을 두고 수십년 포교에 정진했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대전교구장으로서 그리고 대전 카이스트 연구실장 등 최첨단의 과학기술분야에도 참여했다.
1945년 생, 부안상서 감교 초등학교와 부안중학교 부안농고(지금 부안 제일고)를 거쳐 공주사범대학을 나왔다. 천도교 종합대학원장을 비롯한 여러 대학의 교수로 일했다. 종교인으로서는 폭넓은 행보다.
천도교에서는 1862년 최수운이 천도교를 창시하기 이전을 ‘선천시대’라 하고 그 이후를 ‘후천시대’라 한다. 이 후천시대는 ‘한울’의 시대다. 한울님이 사람이요, 사람이 한울림이다. 인내천(人乃天). 만민 사해가 평등, 양반이고 상놈이고 할 것 없이 평등하고 수탈이 없고 착취가 없는 시대가 바로 현세에 이루어진다는 역사관이다. 사람 하나하나를 한울님 같은 존재로 본다. 1894년 전봉준 장군이 혁명의 전열을 정비하여 전주성을 치고 전라도를 휩쓸고 충청도까지 불길을 올린 전선사령부가 바로 백산이었다. 이 잡듯이 잡아 죽이는 일본과 썩어빠진 관군의 토벌에도 꿋꿋하게 쌓아 올린 전적지가 부안 변산 동쪽에 널려 있다. 이제 그 원혼을 보아란 듯이 달랠 때다. 흔히 외세와 지배자는 한통속이었던 것이 우리 부안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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