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불상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곳에 절집과 미륵불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안면 역리 송정마을, 미륵골이라 불리는 곳으로 오솔길을 들어서면 용화사 뒤 야산 밑에 미륵불이 서 있다. 높이는 4.5m로 땅 속에 묻힌 부분을 감안하면 규모가 상당한 불상일 것이다.
이 불상은 어깨와 팔의 곡선이 드러나고 가사는 두 어깨를 모두 감싸는 통견(通肩)이다. 가슴부분이 V자형으로 조각되고, 소매의 폭은 급격하게 줄어들며 양손은 소매 속으로 넣어 맞잡았다. 옷 주름은 같은 간격으로 새겼는데 하의(下衣)에는 물결 모양의 옷 주름을 표현하였다.
얼굴이 신체에 비해 크게 조각되고 얼굴 표정은 낯설지 않아 친근하며 제작 당시 부안 사람들의 평범한 얼굴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어 마치 백제의 미소를 보는 듯하다. 햇빛에 따라 눈두덩 위에는 그늘이 져서 마치 눈썹처럼 보이기도 한다. 귀는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어 후덕한 모습이다. 이 불상은 대체로 고려 전기 석불의 형식과 양식을 따르면서도 옷깃의 표현이나 소매 폭의 형태 등을 볼 때 시대적으로는 고려 후기로 내려오는 것으로 보는 연구자들이 많다. 
미륵불(彌勒佛)은 대승불교의 대표적 보살 가운데 하나로, 석가모니불에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이다. 미륵불을 모시는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이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하는 법당이다. 미륵불에 대한 관념은 미륵신앙으로 이어져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도솔천 상생신앙과, 말세라는 세상을 구제하러 미륵이 하생하기를 바라는 미륵하생신앙의 두 가지 흐름이 있다. 미륵하생신앙은 사회모순을 해결 짓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민중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사회 혼란이 심할 때는 미륵불을 자칭하며 새로운 세상이 왔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출현하기도 했다. 후고구려의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했다거나 많은 한국 신흥종교 창시자들도 자신을 미륵이라고 했는데, 예를 들면 강일순(甑山, 姜一淳)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상제(上帝)임과 동시에 미륵불이라 하여 증산교를 창시하였다.
부안의 미륵사상은 변산의 부사의방장에서 깨달음을 얻은 진표율사(眞表律師)에서 시작한다고 하겠다. 그가 출가한 이유도 신라 지배 밑에서 고통 받는 백제 땅 사람들의 처참한 실상을 보면서이다. 부안 땅에 미륵불상을 세운 것은 첫째는 이 땅에서 겪은 외적의 침입과 백제 부흥운동으로 숱한 생명의 스러짐을 위무하려는 이유와 둘째는, 신라가 망한 뒤에 부안 중심의 해상 세력과 지역 호족들의 독립된 세력 확장과 의지를 표한 것이라는 해석도 해본다.  
용화사 미륵불상은 전각이 있었으나 미륵불이 서 있는 땅이 문중 땅이라서 법정 소송을 거치면서 전각을 철거했다. 용화사의 주지인 지원스님은 미륵불상의 보호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고 했다. 코 부분이 떨어져서 시멘트로 보강했고 어깨 쪽도 떨어져 나간 것은 큰 나무가 미륵불 위로 쓰러지면서 훼손된 것이라고 얘기한다.
고려시대 부안 지역 사람들은 미륵골의 미륵불상으로 위로받고 이곳은 혼란한 시대에 정신적인 중심 터가 되었을 것이다. 미륵불상과 이어지는 고성산성이 서해 바다를 통해 들어오는 외적을 막는 역할을 했다면 가뭄이 들어 고통을 겪을 때면 미륵불상에 가까운 산성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용화사 미륵불상은 오랜 비밀을 간직했지만 입을 떼지 않고 그저 웃음을 띤 채 서 있다. 그 미소는 햇빛을 받으면 점점 밝아지고, 찾는 사람들에게 입을 열어 오랜 역사의 풍상을 밝힐 것만 같은 때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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