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초에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사진에 보이는 부안군청 마당은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이곳으로 끌려온 남녀 젊은이들은 차에 실려 백산삼거리를 거쳐 신태인 역으로 옮겨간다. 기차로 대전을 거쳐 부산에 닿으면 큰 배에 실려 군인으로, 군무원, 노무자, 정신대로 먼 곳까지 끌려갔다.
1939년부터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6년여 동안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600~700만 명에 달한다. 당시 조선 인구가 2천여만 명임을 감안하면 전 민족의 수난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군 병력으로 징발된 조선인이 40여만 명이니 대다수는 노무징용자들이다. 이 중 일본 본토를 비롯해 사할린, 남양군도, 만주, 시베리아 등 국외로 동원된 노무인력이 150만 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450만 명 정도는 각종 보국대, 봉사대, 근로단 등의 이름으로 한반도 내 작업장에 끌려간 국내 동원 피해자다. 
부안지역에서 몇 명이나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갔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부안군청에서 2012년에 조사했던 ‘부안 태평양 전쟁 피해자 명단’에는 1,335명이 신고 되었다. 이 자료에는 군인과 군무원, 노무자, 정신대 등으로 구분됐는데, 징용으로 끌려간 노무자가 가장 많고 군무원과 군인 순이다. 정신대로 신고 된 사람은 세 사람인데, 아픈 과거를 들추지 않으려 해서 이지 어디 세 사람뿐이겠는가? 정신대로 신고 된 엄 씨는 13세에 끌려갔는데 생존여부에는 행방불명으로 기록되었다. 두 김씨 중 한 명만이 해방된 그해 9월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안의 소녀들을 강제로 전쟁터에 끌어가 군인들의 위안부로 삼았기 때문에 과년한 딸이 있는 집에서는 서둘러 혼인시키느라 노심초사했다. 1945년의 부안초등학교에는 고등과 1, 2학년(6년 졸업 후 중학교 못간 사람)이 있었다. 이곳에는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으려 학교에 다니던 여학생들이 많았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은 너무 흔한 일상사였다. ‘부안 태평양 전쟁 피해자 명단’은 국내 강제동원보다는 국외, 특히 태평양 전쟁 피해자 명단이다. 동원된 지 70여 년이 지난 늦은 실태 파악으로 대부분은 사망한 뒤여서 훨씬 많은 사람들이 신고를 안 하거나 신고할 수 없는 처지였을 것이다.
“부안에서는 정신대로 끌려간 소녀가 없다”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주장의 이면은 부안 사람들에게는 이런 참혹한 비극이 없었으면 하는 순박한 바람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광풍에 휩쓸리는 현실에서 부안만이 예외 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끌려간 피해 소녀들을 부르는 이름조차 정립되지 않았다. 정신대(挺身隊)는 나라(일본)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를 담는다. 위안부(慰安婦)는 위로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여성을 가리킨다. 이러한 단어는 가해자나 일본군들이 ‘일본군의 성노예 제도’를 자신의 입장에서 부르는 용어에 불과하다. 이들 소녀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동원된 일본군 성노예제도 피해자들이다. 부안에서 강제로 끌려간 성노예 피해자들도 누군가의 딸이자 누이이다. 우리의 할머니, 이웃의 숨기고픈 아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부안에서도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는 좌우도 없고 진보 보수의 진부한 편 가르기도 있을 수 없다. 해방 후 한 번도 친일청산을 못한 부안지역의 새로운 출발이며, 미래의 봄날을 준비하여 후손에게 물려줄 교육현장이요 역사의 힘찬 발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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