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에 다양한 민족해방 운동이 있었다. 그 중에서 종교를 통한 운동도 빼 놓을 수 없다. 이들 종교 중 대종교나 천도교 등은 국외의 무장투쟁이나 국내에서 활발한 활동으로 많은 희생을 치렀다. 부안 지역에서도 종교 운동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강증산(姜甑山) 계통의 운동이다. 변산면 지서리의 홍순옥(洪淳玉;1893~1951)은 형 홍순문을 교주로 강일순(姜一淳)을 교조(敎祖)로 하여 1930년에 원군교(元君敎)라는 종단을 설립하였다. 이 원군교는 차경석의 보천교가 교단 유지를 위해 친일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자 보천교 혁신운동으로 분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원군교는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강일순의 교리인 후천선경개벽으로 새로운 세상이 실현될 것이며 강일순의 재림을 얘기했다.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자 형식적으로는 해산했지만 더욱 강력한 교단을 결성하여 결사를 조직하였다.
강증산의 신도조리공사(神道調理公事)에 따라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이 대전은 곧 끝날 것인데 이것은 조선이 독립할 전조(前兆)라 하고 조선은 독립하여 선진국이 된다고 주장했다. 재림하는 강증산의 일을 위해 인물을 양성하려고 홍순옥, 김만암 등을 49역원에 임명하였다. 매년 정월 3일에는 천지공사(天地公事)라는 행사를 거행할 목적으로 위천혼의 기원제를 행하였다. 여기서 천지공사는 후천선경을 열고, 조화정부를 세워 세계의 민생을 구제한다는 큰 뜻을 담고 있다. 강증산이 폐하가 되고 조선이 독립한다는 것 등의 주장은 일본제국주의 입장에서는 용납이 안 되는 불온한 사상이었다.
일제는 이들 원군교 신자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하여 징역 1년에서부터 4년의 죄를 씌워 감옥살이를 시켰다. 홍순옥, 박일명, 김만암, 강양원, 국채준, 이내룡, 유원상, 이득춘 등인데 이들이 전주지방법원형사부에서 판결 받은 날짜는 해방을 1년 7개월 앞 둔 1944년 1월 10일이었다.
이들은 주로 산내면(지금의 변산면) 지서리에 살면서 활동했다. 그러나 산내면 면소재지에서 활동은 위험했다. 이곳에는 일제의 강제력을 집행하는 말단기관인 주재소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상주하는 일제순사는 면단위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활동의 철저한 감시와 보고 강제력의 집행으로, 아이가 울 때 ‘순사가온다’고 하면 울음을 그칠 정도였다. 위의 사진은 산내주재소가 있던 곳으로 해방 후인 1964년의 산내지서이다. 그 뒤로 명칭이 파출소로 바뀌고 격포로 옮겨갔다.
1941년에 홍순옥 등이 결사를 이루었던 묵방곡은 묵정이라는 마을로 해창에서 부안댐으로 들어가다가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만나는 계곡이다. 이곳은 천주교인들이 하서 등룡리로 들어가기 전에 처음으로 닿았던 곳이고, 온천이 개발된다고 하여 일제 때부터 기사에 오르기도 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의 국내의 종교는 일제와 대립각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특히 지도자들은 교단을 유지하기 위하여 신사참배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은 신앙을 위한 신앙, 그저 현실에 눈감고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죽은 뒤 행복한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늘어놓았다. 이러한 사회의식 없는 신앙생활에 일제가 놀라거나 관여할 필요는 없었다. 세상에 눈 돌리지 말고 그저 후세에나 전념하라고 지도할 뿐이었다. 이런 의도에 반하는 종교 단체 결사를 일제는 철저히 감시하고 탄압하였다. 일제는 산내면 지서리에서 이루어지는 홍순옥 등의 원군교 교인들을 국체를 부정한다거나 치안을 방해한다는 이유를 들어 치안유지법으로 다스렸다.
1930년대에 산내면에서 이루어진 원군교 활동을 단순히 강증산 계통의 종교 행위로 치부하기 보다는 엄혹한 시대에 조선의 해방을 얘기하고 행동했던 사실을 더 밝혀내고 알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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