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의 기록이 차고 넘치는 것 같지만 어느 부분은 기록이 없어서 시대를 규명하기에 어려울 때가 있다. 특히 지역사(地域史)에 있어서 증언 외에 자료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동학농민전쟁 이후 부안지역 천도교의 상황이 늘 궁금했는데 마침 김광렬의 『白菴錄, 백암록』이 있어서 조금은 접근할 수 있었다.
  김광렬(金光烈; 1897~1974)은 백산면 용계리 백산산 기슭의 산내에서 태어났다. 천도교에 귀의하여 자(字)는 종민(鍾敏), 도호(道號)는 백암(白巖)이다. 그는 자신의 활동에 대해 자서전, 논설, 설교, 수상록, 시문 등을 남겼다. 근현대사의 격변기에 살았던 분들이 자신의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위험했다. 일제강점기라서 저들에게 빌미를 주어 체포되기도 하고 후손들에게 어려움을 줄 수 있기에 육필(肉筆)을 남기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백암은 기록을 남겼다.
  광렬은 13세 때인 1909년에 의병을 처음 만났다. 의병들이 밤에 산내 마을의 규모가 큰 집에 들어와 얘기한다. “우리는 국적(國賊) 왜놈을 쫓아내고자 각 군 고을에서 궐기한 의병인데 그 군자금을 징수하는 바요. 국민은 가세(家勢)대로 헌납할 의무를 가져야 하오.” 라는 말로 설득했다. 광렬은 이 말을 듣고 어머니에게 달려가서 우리 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물었다. “그들 말을 들어보니, 집안 형편대로 꼭 바쳐야 국민의무를 다하는 것이 된데요. 이들은 생명을 바치고 나서지 않았습니까” 돈 여덟 냥을 전대에 담고 또 담배를 있는 대로 가지고 가서 드리니, 범상치 않은 모자(母子)라고 칭찬을 했다. 의병 부대를 이끌던 대장인 듯한 사람은 광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장차 크게 될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그 후 수일이 지나서 백산면 하청리 쪽에서 총소리가 콩 볶듯 났다. 광렬이 집에서 나와서 백산산에 올라서 바라보니 백산 앞 평야 지대로 도망하는 사람들을 일본 기병들이 말을 타고 마구 총을 쏘며 쫓았다. 총에 맞은 사람들이 턱턱 쓰러져 죽는 것을 보고 심장이 찢어지는 듯 하고 정신이 아득했다. 이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프고 3일간이나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의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들은 누구일까. 며칠 전에 광열의 동네를 찾았던 의병이 아닐까. 저 들판에서 죽는다면 누가 묻어주지? 그런 죽음을 가족들은 알기나 할까.
  23세 때인 3.1운동 때 광렬은 화호시장에서 송윤초(宋尹初)를 필두로 상인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다음 해는 정갑수(丁甲秀)와 함께 서울에서 3년간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1924년에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탈출을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1년 6월의 형을 받고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30세인 1926년 부터는 연성기도 등 천도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의 천도교 참여는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면이 크다.
  광렬은 천도교 포교에 열심이었다. 오문술 등의 다수 동덕(同德)을 입교시켜 부안교구를 백산면 거룡리 김재문의 집에 설립하였다. 그 뒤에도 박기중, 김규만, 김화섭 등의 수십 인을 포교한다. 줄포면에는 최금동을 통하여 줄포교구 설립을 지도했다. 상서면 감교의 호암수도원을 짓는데도 노력했다.
  김광렬의 이야기는 의병의 만남과 죽음에서 시작한다. 그가 나이 들어 이 일을 기억하고 기록한 것은 자신의 삶에 크게 자리하고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리라.
 

부안의 1909년은 의병운동이 활발했지만 많은 희생으로 위기에 처한 해이기도 하다. 부안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무명(無名) 의병(義兵)을 떠올리는 것은 의로운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고,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작은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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