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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문화의 밥과 꽃72- 동학농민군 우재(優齋)를 만나기는 해질녘이 좋다①

문화체육관광부는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싸워 크게 이긴 황토현 전승일인 1894년 5월11일을 법정기념일로 최종 선정했다고 2018년 11월 9일에 발표했다. 그동안 법정기념일은 4개 지자체가 추천한 지역 기념일이 대상이 되었다. 황토현전승일 외에 고창 무장에서 처음 봉기한 무장기포일(4월25일), 부안 백산에서 4대 강령과 봉기 격문을 발표한 백산대회일(5월1일), 전주에서 관군과 강화를 맺은 전주화약일(6월11일)이었다.
황토현 전승일로 법정기념일이 선정된 것에 대한 이론(異論)이 만만치 않다. 이런 점은 앞으로 추이를 지켜볼 일이다. 동시에 부안지역에서는 그동안 지역 동학 연구와 활동을 이 기회에 되짚어볼 일이다. 지금부터라도 동학연구와 유적지 발굴, 동학에 참여한 인물들의 옛집과 활동을 찾아 안내판을 세우고 동학 농민군의 정신을 재조명하고 학습해야 할 것이다.
지난 11월 6일에 상서중학교 학생들과 동학기행을 하면서 오랜만에 상서면에 있는 김기병 농민군의 기념비를 찾았다. 김기병이 상서 출신이고 본 면에 기념비가 있지만 지역 사람들의 관심이 적다보니 찾기도 쉽지 않았다.
부안 농민군 지도자로 활약한 김기병(金基炳; 1831-95)은 부안(扶安) 김씨(金氏), 호는 우재(優齋)이다. 부안군 상서면 내동출신으로 농민군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혀 1895년 2월 1일에 65세 나이로 일본군에게 총살당했다.
우재는 1894년 2월에 부안에서 봉기해 4월 3일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부대와 합류하였다. 변산 해안의 군기고를 접수하고 농민군의 무장 강화와 전투훈련에 참여했다. 백산집회 이후에는 농민군과 함께 부안현의 무혈함락에 관여했다. 동학군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도 부안에 잠입하여 동지들을 규합하여 끝까지 저항했다. 김기병은 이웃 주민의 밀고로 체포되어 부하 8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동문안 당산이 있는 곳의 성 밖에서 총살되었다고 전하나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다.
두 아들은 이때부터 어려움을 떠안고 살길을 찾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가세는 점점 기울고 일제강점기가 이어지면서 자손들은 험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후손들은 개암사 가기 전 왼쪽 길 월정 약수터 올라가는 들머리에 1993년에 3월에 우재 어른의 비를 세웠다.
김기병의 호 우재(優齋)는 부드럽고 넉넉함을 의미한다. 나라가 위난의 시대가 아니었다면 그는 향촌 사회의 두터운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뜻을 평화롭게 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재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 농민군에 참여하는데 이런 예는 찾기 힘들다. 나이 든 어른이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여 젊은 사람들과 함께 무기를 든 이유는 무엇일까. 동학농민군이 주장하는 그 길이 현실을 개혁하고 미래 조선의 희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상하귀천의 철저한 계급 사회의 폭압에서 백성을 구하고(除暴救民;제폭구민), 나라를 지키고 백성의 안위를 지키는 길(輔國安民;보국안민)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동학농민전쟁은 실패하고 처절한 죽음들을 맞았지만 단순한 실패로 규정할 수 없다. 농민군의 정신이 그 뒤에 이어지는 항일의병, 3.1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했으니, 역사는 어떤 천재의 창조라기보다는 선조들의 희생정신이 흘린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 같은 것이다.
개암사를 들르는 사람들에게 김기병의 기념비를 한번쯤 찾기를 권한다. 연로한 노인이 무기를

들고 조선의 관군과 일본군에 맞선 그의 뜻을 고민하고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의 묘역에는 오후에야 해가 비친다. 그가 황혼에 무기를 든 것처럼 하루의 끝자락인 석양에 태양이 그를 찾아온다.

정재철  jjc2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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