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 신석정의 옛집, 청구원(靑丘園)을 찾곤 했다. 동네 집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마당에는 텃밭과 마당 주변에는 울타리도 있었다. 친근하고 소박했다. 그 후 석정문학관이 들어서고 청구원도 변했다. 생경해졌다. 이런 곳에서 시를 썼다고는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집과 주변은 정돈됐고 한마디로 너무 매꼬롬해졌다. 그리고 그 옆에는 뜬금없는 정자가 들어섰다. 정부 돈이 들어간 곳에는 어김없이 이렇게 정자를 만들어 놓은 곳이 많다.
  다시 청구원을 찾으면서, 나무 울타리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서정주가 고창에서부터 걸어서 석정을 찾아왔다는 얘기가 있다. 그때 집 앞 논에서 일하던 석정에게 “이 동네에 시 쓴다는 신석정이라는 사람이 있다는데”라고 물었다는 말이 전하는데, 집 앞에 작은 텃논이라도 만들어 놓으면 어떨까. 마당에도 텃밭을 가꾸면 좋겠다. 관리가 어렵다면 석정의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텃밭을 나누어 관리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시인의 집이 그저 마른 몰골의 집이 아닌 시의 산실인 청구원으로 회복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이다. 이곳 청구원에 들르면 시심이 일어나서 시인 아닌 사람도 시를 쓰고 싶고 석정의 시 한편 정도는 읽고 외우고픈 충동이 일어나면 좋을 텐데.
  외부에서 오는 방문객들은 석정 문학관을 들르고 청구원을 보면 석정의 모든 것을 봤다고 생각해서인지 다른 지역으로 미련 없이 떠난다. 그러다 보니 이곳은 다른 곳과 소통할 수 없는 외로운 섬이 되었다. 그렇다고 석정과 관련해서 더 볼 것이 있냐고 물으면 마땅히 답하기도 어렵다. 찾아본다면 석정이 걷던 길과 시상을 얻었던 곳들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이런 것을 밝히는 데는 소홀했다. 석정은 부안 배차장에서 내리면 걸어서 선운동의 청구원에 닿았을 것이다. 석정이 걷던 이 길을 걸어보는 것이다. 성황산에 자주 올랐으니 그가 이름 한 동진 가는 황계재도 찾아보고, 상술재 정상에서 서해 바다도 얘기하고 행안이나 염소로 빠져나가는 길도 살펴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석정의 집이 보이는 성황산 바위 위에서 사진 한 장 찍는 여유도 권할만하다. 석정문학관에서 출발하여 그가 몸을 뉘인 행안 고성산성을 찾는 길도 봄 가을로 좋다. 그의 시와 삶을 얘기하면서…
 그의 시 배경이 된 곳이 여럿이다. 첫 시 ‘기우는 해’가 발표된 것은 1924년 11월 24일이지만 쓴 날은 4월 19일인데, 계화도를 갔다 오다가 시상을 얻었다고 한다면 세봉산에서 기우는 해를 봤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 4월의 해는 돈지와 계화도 사이로 기운다. ‘고향시초’의 배경은 현재 상원 아파트 앞의 부안양조장이다. 이곳 새벽은 많이 북적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짐승이나 먹는 술지꺼기라도 얻어가려는 여인들이 자배기를 들고 부세부세한 얼굴로 새벽을 깨웠다. 도로를 통해서도 이 길을 갈 수 있지만 부안읍에 있는 성터가 복원된다면 성터 길로 부안읍내를 보면서 걸을 수도 있다.
  시인을 기억하고 추념하는 방법은 여럿이다. 문학관을 충실히 운영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곳만 관람한다 해서 석정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안의 곳곳에서 시인의 흔적을 기억하고 느끼는 것은 또 하나의 무형 문학관이다.
  살아생전 고향 사람들의 박한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시인에게 고향 사람들의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때이다. 험한 세상을 시 정신 하나로 헤쳐나간 석정의 체취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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