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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韓末) 변산의병(邊山義兵) 종말(終末) 이야기
  • 김형주 (전 부안여고교장, 향토사학자)
  • 승인 2018.08.24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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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본지(676호. 8월17일자)에 정재철 선생님이 집필하시는 ‘부안문화의 밥과 꽃’ 59회 연재로 “청림의 김병선은 독립운동을 했는가?” 편이 실렸습니다. 이 글을 보시고 부안의 저명한 향토사학자이자 전 부안여고 교장을 역임하신 김형주 선생님이 우리 고장에 전해 내려오는 ‘변산의병’에 관한 글을 보내 오셨습니다. 지면을 빌어 깊은 감사의 말씀 올리며,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 말>

산이 높고 수려하여야만 명산(名山)일까? 거기에 민족의 의기와 기상이 서려 있고 어머니 가슴 같은 포근함이 깃들어 있으면 명산이 아닐까. 변산은 겨우 500m 내외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명산이다. 국란이 있을 때마다 지역 사람들은 그 첩첩 싸인 깊은 가슴에 의지하여 침략자들과 싸우며 고장을 지키고 나라를 수호했다.
 
부안 사람들의 지역 지키기

삼국시대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백제의 부흥군이 상서면 개암동 위금산성(位金山城)에 웅거하여 660년부터 3년을 싸웠으니 이곳이 주류성이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 때는 변산을 근거지로 부령별초(扶寧別抄)를 조직하여 저항하였다. 몽고가 일본을 침공하기 위해 여몽동정군(麗蒙東征軍) 수송을 위한 전선 900여척의 일부를 변산 기슭 줄포만의 검모포(진서면 구진)에서 건조하였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국란에는 채홍국(蔡弘國), 김홍원(金弘遠), 이유(李瑜)의병장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변산 기슭의 호벌치(胡伐峙)와 장팻들에서 처절하게 싸워 부부와 부자형제 등이 순절하였다. 이유 부부를 기리는 상서의 타루비(墮淚碑)는 지금도 눈물을 흘린다.
을미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으로 촉발된 전국적인 의병봉기는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으로 이어진다. 지역의병의 활동상황은 남아있는 것이 잘 보이지 않지만, 고제신(高濟臣)열사와 김환(金桓)의사의 활동상황이 당시의 신문기사와 재판기록으로나마 전해지고 있다. 역대 군지류에도 잘 정리되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어 다행이다. 나라를 지키고 도적을 쫒으려 일어선 이름 없는 의병들이 행한 일들이 한 세기가 지난 현재 이대로 묻혀 지고 말 것인가? 생각할수록 가슴 아프다. 구전되던 의병들의 이야기가 듣기 어려웠던 이유가 있다. 의병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일제에 알려지면 수난을 당했기에 가족과 친지간에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그러다 보니 금기된 이야기가 되고 사실들이 망실되었다. 의병운동이라는 귀중한 역사를 잃어버린 것만 같아서 죄스럽고 안타깝다.
을사늑약을 반대하며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은 1905년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다. 그는 경기도 포천이 고향이지만 제자인 순창의 임병찬(林炳瓚)과 태인,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체포되었으며 대마도에서 단식 순절하였다. 뒤이어 장성의 기삼연(奇參衍), 고광순(高光洵)이 큰 규모의 의병을 일으켜 곳곳에서 승전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1908년 기삼연, 고광순이 연이어 체포 사살된 이후 의병활동은 침체일로를 걸었다.
부안지역의 의병들은 변산을 근거지로 투쟁하였지만 고창 선운산에 본부를 둔 기삼연이 순절하자 조직이 무너지고 끼리끼리 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등의 산발적인 활동을 하며 다른 지역과 연대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신문 기사들을 확인하면 의병들은 군 경계를 넘나들면서 활동했다. 부안·고창·흥덕·고부 등은 인접지역이어서 수시로 지역 이동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의병은 지역 출신들이 많아서 지형과 지세를 잘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고, 특히 부안은 변산에 깊은 골들이 많아서 의병들이 선호하던 곳이었다. 1909년 한 해만 해도 전해산의진, 박도경의진, 신도남의진 등이 부안에서 교전하다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였다.
 
변산의 임기홍 의병 이야기

내가 향토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로부터 그 시대의 많은 옛 이야기를 들었던 영향이 컸다. 의병 이야기도 어머니의 숙부인 임기홍(林基弘)이 의병이었고 그분의 이야기가 한편의 소설 같아서 흥미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임기홍은 하서면 금강동에서 태어났으며 중류가정의 유학자 임우인(林愚仁)의 둘째 아들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민첩하였다는데 변산에서 의병활동을 할 때 청호의 고제신 의병과 변산을 주름잡고 다녔다고 한다. 이때 “왔다 갔다 고문경 날아가는 임기홍”이라는 유행어가 나돌았다고 한다. 문경은 고제신의 자다. 임기홍은 잠복한 일본 경찰과 맞닥뜨려 육박전을 벌이다 때려눕히고 탈출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왜경의 칼에 한쪽 눈을 찔려 평생 애꾸눈의 장애자로 살다 1941년 경 서거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이 할아버지를 “산중 하나씨”라고 불렀으며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임기홍이 변산에서 의병으로 은거하고 있을 때, 전남 함평 나산 사람으로 선산 김씨 김조락과 같이 지냈는데 이 분은 함평, 영광 지역을 주름잡으며 부자들을 윽박질러 많은 군자금을 조달하였으므로 고향에 발붙여 살 수가 없었다. 김조락이 만주로 탈출하면서 아들 용호와 손자 홍두를 임기홍에게 맡기고 상서면 청림 노적매의 진사 박필환(朴弼桓), 김병선(金炳善)과 더불어 만주로 탈출하였다고 하였다. 그 후 아들 용호는 변산의 회양골에서 숯막을 짓고 숯을 구워먹고 살다 병사하였다 하며, 손자 홍두는 천애의 고아가 되었는데 나이 30이 되도록 장가도 못가고 있어 임기홍이 자신의 딸과 혼인시켰고 회양골에 계속 살았으며 말년에는 고부 만수동으로 이거하여 살 때 내가 두어 번 뵌 일이 있다. 내겐 외사촌 이숙이 된다.
 
박필환과 김병선, 만주로 탈출
 

김병선의 처 김명숙의 생전 모습

(이 분을 기억하시는 분은 신문사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또 한 변산 의병 이야기는 노적매의 진사 박필환(朴弼桓)과 청림 김병선(金炳善)의 이야기다. 노적매와 청림은 같은 청림리에 속하며 옆 동네이다. 진사 박필환은 1894년 고종 31년에 마지막으로 실시한 식년시(式年試)의 소과(小科) 진사과에 합격한 진사다. 대대로 문한이 끊이지 않는 양반집안 출신으로, 이 때 부안에서는 두 사람이 합격하였는데 또 한 분은 보안면 월천리의 허권(許權)으로 거부 허방환(許邦煥)의 부친이다. 이 때 노적매 고씨 집안에서는 고필상(高必相)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는 영광을 누렸다. 합격과 급제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크다.
아무튼 박필환은 그 강직한 선비정신과 자존심으로 당연히 을미사변의 치욕적인 부끄러움에 분개하여 의병에 동참하였을 것이고 청림의 젊은 제자 김병선 역시 박진사의 제자로 사제가 의병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1915~16년경에 이르러 변산의 의병은 거의 궤멸되었으므로 이에 이 두 분이 주도하여 함평의 김조락과 함께 만주로 탈출 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들이 만주로 탈출한 시기가 1918~19년경으로 추정되는데 박필환이나 김조락은 이미 노령에 접어든 시기였다.
  박진사의 아들 박상철은 아버지의 엄격한 정훈(庭訓)을 받들지 못하고 일본 경찰들에게 시달리며 불량한 생활로 떠돌았다고 한다. 손자 박문채(朴文彩)는 2000년대 초까지 나와 국사편찬위원회의 사료조사위원으로 활동한 친구다. 그는 가끔 얼굴도 못 본 할아버지가 그리웠던지 만주에서 행적이라도 알았으면 하며 아쉬워하였고 할아버지의 유품인 서책들을 아끼곤 하였으나 수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내가 지금까지 부안의 향토사를 공부하며 변산을 중심으로 한 의병들의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다. 많은 의병들의 비화가 묻혀있을 터이지만 어디에 잠겨있는지 알 길이 없어 안타깝다. 백여 년이 지난 오늘, 그 거룩한 자취와 비화들이 가뭇없이 묻혀 소멸되어버린다면 얼마나 죄스럽고 민망한지 내 스스로도 부끄럽다. 그러나 지금 청림의 의병 김병선이 1918~19년경 만주로 탈출하여 홍범도장군 휘하에서 항일투쟁을 하면서 국내에 잠입, 왜경과 싸우다가 순절,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는 소식은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이는 변산 의병들의 맥이 홍범도장군의 독립군에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어찌 변산의 의병들의 전적이 김병선 한 사람 뿐이랴. 끝내 밝혀지지 않고 묻혀버렸을 사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김병선의 딸 김동순

김병선 열사의 외동 딸 김동순(金東順)은 한 맺힌 세월 백년을 살다 2017년 12월에 서거하셨다. 그분이 살아생전에 아들 홍영호에게 “너의 외조부는 독립운동을 하시다 가신분이다. 부끄럽게 살지 말라”고 늘 당부하셨다고 한다.

글을 마치며

올해로 나라가 광복된 지 73년이다. 아직도 이 땅에는 우리의 철천지 원수인 일본에 빌붙은 친일파의 자손은 높은 자리를 꿰차고 잘 살고 있고, 독립운동 하신 분들 자손은 셋방살이에 일용직 노동으로 찌든 삶을 이어가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희망 없이 살고 있다. 왜 그럴까? 이 땅에 민족의 정의가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에는 독립운동 했던 선조들의 얘기들이 교과서에도 많았고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러나 친일파 후손들이 득세하는 험한 시대를 거치는 동안 독립운동은 옛이야기로 오래도록 묻혀버렸다.

해방 이후부터라도 정부에서 독립운동 사실을 연구하고 후손들을 찾는 열심을 보였다면, 훈장을 추서했으나 후손이 나타나지 않아서 정부가 훈장을 보관하는 사례는 없었을 것이다. 독립운동가라는 선조를 둔 덕택에 가난하고 못 배우고 어려운 삶을 살았던 후손들을 찾아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 독립한 나라의 정부가 맨 먼저 할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정부는  그들의 후손들이 자랑스런 선조를 이야기하며 긍지를 가지고 살도록 정부차원에서 독립운동가를 찾고 연구하는 노력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김병선의 외손녀와 손주사위. 뒤로 보이는 배경은 과거 김병선의 처 김명숙이 살았던 곳이다.

 

김형주 (전 부안여고교장, 향토사학자)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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