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의 극심한 상처를 딛고 불우한 천재에서

미래의 사상을 새롭게 모색하는 이을호 선생

1894년 저 갑오년의 위대한 동학농민혁명은 비단 정읍군이 홀로 독점적으로 차지할 영광과 몫만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된다. 동학농민혁명의 가치와 이념과 깃발이 숭고하고 위대한 만큼이나 그것은 정읍만이 아니라 당연히 부안과 고창과 전주가 온전히 그 정신을 나누어야만 하고 전북만이 아닌 호남 전체가 나누어야만 하고 호남만이 아닌 당연히 우리 민족 전체가 그 본질과 의미를 나누고 하나로 추구하여야만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당위론적으로는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것이 상당히 유감스럽고 한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역사적인 흐름으로 보아도 부안은 적어도 동학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백산기포라는 엄연하고 중대한 현장성이 부안군 관내의 백산웅거에 있었음을 깊이 깨닫고 일개의 지역적 난이 아닌 동학혁명이 전 조선과 조선왕조에 대한 혁명적이며 근원적인 개혁을 추구하며 깃발을 올렸던 그 놀라운 역사적 계기와 사건과 현장을 성역화와 더불어 깊게 추구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책임과 운명과 가치를 방기하는 것이 되고야 말 것이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백산기포에는 남접과 북접의 차이가 분명히 있었을지라도 부안 현지의 동학대접주인 김낙철도 그 차이를 뛰어넘어서 그 백산기포의 현장에 같이 참여할 정도였다는 것도 매우 중요한 사실이 될 것이다. 그는 동학내부의 조직과 흐름과 계보상 비록 호남과 부안의 대접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북접로선을 견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낙철이 적어도 백산기포에는 소극적으로나마 참가하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백산기포를 통해서 비로소 동학농민혁명군은 그 혁명적 이념과 조선왕조에 대한 분명한 대적개념과 깃발을 확실하게 천명한 것이었다. 아울러서 부안의 백산기포를 통하여 그 이념적 깃발과 강령적인 선언은 물론이고 실제로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할 총대장으로 녹두장군 전봉준이 추대되고 그와 함께 수뇌부로서 손화중과 김개남을 녹두장군을 보위하면서 더불어 함께 집단지도력을 설정한 것이었다. 그간에 역사적 자료의 문제로 부안의 백산기포가 설왕설대되다가 주산면의 선비가 쓴 일기에 의하여 백산기포의 역사성이 엄정하게 다시 인정되었음은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여하튼간에 조선의 낡은 이씨왕조체제의 마지막 썩은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경천동지할 동학농민혁명은 호남의 수부 전주성을 점령하고 호남 전라도 일원에 강력한 집강소 통치까지도 이루어내었으나, 친청 사대의존적인 민씨 척신들과 무능한 정부에 의하여 청나라의 파병이 이루어지고 이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간악한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하여 이를 빌미로 일본
군이 조선에 진주하여 청일전쟁이 벌어지고 그 결과 일본군의 승리와 함께 다시 저들의 근대적 무력은 무기나 전술에 있어서 사실상 그 비교가 불가하던 수십만의 동학농민혁명군을 무참히 도륙 학살하면서 마침내 공주의 곰나루전투에서 대패하여 동학농민혁명은 그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제국주의는 필연적으로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고 군대를 해산시키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와 노예의 운명으로 전락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다시 옛 동학혁명의 농민과 전사들이 의병으로 떨쳐 일어나 싸웠으나 그 결과는 참으로 커다란 흐름으로 승리를 이룰 수는 도저히 없는 현실이었다. 부안의 변산 일대에서도 의병의 활약이 이루어졌으나 결국 모두 패배로 귀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일 반제국주의적 항쟁은 다시 3.1운동 전후를 통하여 일본과 조선천지에서 거대하게 불붙었으며, 특히 비폭력평화시위이던 3.1만세가 간악한 일제의 폭압에 의하여 무참히 좌절되자 이에 근원적인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보다 혁명적이고 민중 계급적인 노선과 사상의 추구가 이루어졌다. 특히 러시아와 상해 등의 해외에서의 독립투사들이 1917년의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인 러시아혁명에 커다란 자극과 영향을 받고 조선혁명의 모델로서 맑시즘과 러시아혁명과 같은 혁명사상과 전술을 추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초기의 이같은 새로운 흐름 속에서, 지운 김철수 등은 일본에서 새로운 사상과 민족해방의 전술로 맑시즘을 받아들이고, 상해에서의 초기 혁명적 운동과 조직활동에 이어서 1925년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의 창당을 통하여 보다 본격적인 혁명적 실천과 전술로 나아가게 되었다. 지운 김철수는 드디어 초기의 조선공산당의 핵심간부에서 마침내 엠엘당의 총비서-당수로 당의 위기를 수습하고 전당을 이끄는 중책을 감당하게 된다.
 
지운 김철수는 1930년대와 1945년 해방시기까지 길고 긴 감옥에서 수감되는 운명이었으며, 해방 후에 공주형무소에서 출감한 후 일제하에 치열한 지하투쟁을 전개한 박헌영에게 힘을 실어주고 지원하는 자신의 역할을 겸손하게 설정하고 수행하였다. 그러나 차츰 심각해져가는 박헌영을 중심으로한 남로당의 파벌중심의 운영에 김철수는 자신을 포함한 당중앙위원 원로급을 묶어서 당의 운영에 강력한 비판과 제언을 하였으나 박헌영은 이를 중징계하고 만다. 이것은 박헌영과 그가 이끄는 남로당의 한계와 비극을 미리 예견케 하는 상징적인 사건일 수 있다고 보인다. 즉 지운 김철수는 자신이 일제하에서 치열했던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원로임에도 불구하고 박헌영을 지원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당에 애정을 가지고 좋은 로선의 확립을 위하여 비판하고 제언하였던 것이 싸늘한 중징계로 돌아온 것이었다. 지운 김철수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뜻을 같이했던 당중앙위원들의 면모는 전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역사에서도 결코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김철수와 만주폭동사건의 강진을 비롯한 혁혁한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결국 박헌영과 그를 중심으로 했던 콤 크룹 중심의 폐쇄적인 일련의 파벌그룹이 강력한 당의 헤게모니를 점유하고 폭넓은 당의 화합과 에너지를 결집하지 못한 데에서도 박헌영과 남로당의 운영에 심각한 한계와 비극의 결과를 가져온 것이기도 했다. 지운 김철수도 이같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당의 현실적인 한계와 박헌영의 리더쉽에 실망하고 뒤이어 몽양 여운형과 뜻을 같이해서 활동을 하다가 결국에는 몽양의 혜화동 로타리에서의 피습 사망 후에 정치활동을 마감하고 현실정치에서 은퇴하여 부안 향리로 돌아와 초야에 묻힌 야인으로 후반생을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지운 김철수의 정신과 기개를 보여주는 고고한 유적

지운 김철수는 이와 같은 경로로 은퇴를 하고 향리에 묻혀 살았어도 그가 씨를 뿌렸던 진보의 씨알들은 부안사회에 강력하게 성장하여 부안은 호남에서도 알아주는 강력한 진보세력의 아성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세력 역시 이상은 좋았을지라도 미국이 사실상 지배하는 해방공간의 정국상황에서 강력한 옛 친일세력이 친미세력으로 둔갑을 하면서 처음에는 대의명분에서 비교도 되지 않는 우세한 입장에서 차츰 우익과 보수의 힘이 강력하여지고, 또한 그 위에 남로당과 당의 방침에서의 섯부른 오류와 지방 현장에서의 노련하지 않은 집행으로 인해서 급속히 그 힘을 잃어가고, 여기에서 쫓기게 된 남로당세력이 변산으로 입산하여 빨치산활동을 하다가 토벌당하기도 했다. 또한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체 한국의 상황이 그랬었지만, 특히 좁은 부안사회 안에서 이념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원수가 되어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비참한 동족상잔의 대립과 비극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전쟁의 상황 속에서, 합리적 민족주의자들이나 합리적이며 선한 진보인사들도 모조리 빨갱이 좌익들로 몰려서- 물론 그 반대의 선한 보수적 인간들도 극단적인 보수를 넘어서 극우적인 세력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처참한 학살극과 함께 한 개인과 가정의 운명이 암장되고 그들의 삶과 행복이 송두리채 뿌리를 뽑히는 지옥적인 현실이 오랫동안 빚어지고야 말았다.
 
얼마나 많은 장기수들이 고난의 삶을 살았는가. 그중에 비교적 건강한 민족적 양심과 진보적 의식을 소유하던 전형적 지식인과 시인이었던 부안의 걸출한 시인 신석정도, 그가 6.25가 일어나면서 임시인민위원장이 되고 또한 인민중학의 교장을 했던 이력으로 인해서, 전쟁 이후에는 무서운 고향의 이념적 현실에서 완전히 출향하여 평범한 교사생활을 하면서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누리면서 조용하고 평온한 삶을 그나마 영위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신석정 시인으로 말하자면, 일제하의 젊은 날에는 박한영 스님 문하에서 서정주등과 함께 동문수학하면서 젊은 문인들의 뜨거운 정리로 서로 흑석동의 서정주 집과 부안 선운동의 신석정 시인의 집을 방문하고 그리워하는 등 자별하게 지내기도 하였으나, 일제 말에 서정주가 총독부 기관지에서 근무하면서 노골적인 친일시를 쓰고 이어서 해방 후에도 이승만을 찬양하는 어이없는 서정주의 정치적인 치희와 현실을 목도하면서, 대쪽같이 꼿꼿하고 추상같던 신석정 시인과 서정주의 이념적 관계는 최악이 되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부안은 조선 중기의 매창의 출현과 그 존재로, 그리고 일제하와 해방 이후에 ‘대바람소리’와 큰 산같이 의연하던 시인 신석정의 존재와 문학사적인 그의 향기로 인하여 생거부안과 산자수명한 자연 못지않은 빼어난 시인의 고향으로도 그 큰 성가를 얻게 된 것도 이 땅의 축복이라 생각된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사회의 치열하게 타오른 민주화의 들불과 함께 부안사회에서도 이러한 큰 흐름과 함께하여 농민운동의 불꽃이 점화되고 그 결과로 우리의 민중사에서 크게 조명하고 다룬 등룡리소몰이 투쟁이 전국적인 투쟁으로 각광을 받기에 이르른다. 초기의 민주화 투쟁에 서 어린 고교생으로 참여하고 고난을 당하였던 전주농고생 고영조의 출현과 함께 그가 한 때 소망했던 성직자의 길을 접고, 농민과 민중운동가로 고향에 정착하여 살아가기를 원하면서 더불어 동지가 된 박배진, 오건, 이백연, 김진원 등등의 좋은 동지적 관계들과 활동 속에서 부안민중운동이 부안에서의 한겨레 신문지국의 운영과 전교조 운동 등등과 성장하여 간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인 것이다. 이렇게 성장하여가고 씨를 뿌려가던 씨알들이 후에 부안에서의 반핵평화운동으로 전국을 뒤흔든 부안공동체의 깃발과 단결에까지 이어짐은 필연적인 일인 것이다. 여기에 오랫동안 민중의 사제로서 일찌기 임수경과 함께 분단의 벽을 넘어오면서 그 진면목을 우리 역사와 현실에 보인 문규현 신부가 마침, 부안의 성당 주임사제로 부임하던 기막힌 상황에서, 원불교의 김인경 교무, 개신교의 황진형 목사, 불교의 진원 스님 등을 망라한 범종교적인 연합의 힘과 많이 그간에 지역에 뿌리내리고 성장한 부안농민회와 김진원 회장의 부안사회를 더 이상 생명과 생태가 위협이 되는 현장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결연한 생명운동 반핵운동으로 그것도 매우 부당한 군수의 독단적이고 불의한 핵폐기장 유치 건을 부안을 사랑한 할머니 어머니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로 온전히 단결되고 묶어져 장엄한 투쟁과 깃발로 승리한 것이 부안반핵운동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를 통하여 부안은 1894년 저 위대한 동학혁명이 부안백산의 기포를 통하여 전국적이며 본격적인 혁명으로 승화된 것과 같은 부안절대공동체로 승화되고 자리매김한 것은 부안의 명예와 자신의 정체성의 놀라운 확립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부안 하서면이 낳은 전주고등학교 개교이래와 전국적인 천재였으면서도 김근태가 주도한 민주화청년연합의 실질적인 차세대 지도자이던 빛나던 이을호가 19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야만적 폭압 속에서 정신적인 육체적인 심각한 상처를 입고 평생을 불우하게 지낸 것도 부안의 아쉬움의 하나였다. 그 이을호가 부안 향리에 낙향하여 무려 7년을 농사를 지으면서 역시 민주인사인 부인 최정순과 함께 두레공동체를 꾸리고 노력한 것도 그들의 하나의 의미와 성과였다. 이을호의 조부는 일찌기 증산사상에도 경도하였던 분이며, 이러한 배경이 오늘에는 이을호가 새롭게 꿈꾸는 통일사상과 비젼의 일부와 요소가 된다고 보여지고 기대가 된다. 오늘날 이을호는 아직 완쾌는 아니어도 상당히 많이 회복된 것으로 보여지며 그는 우리사회의 새롭고 창의적인 미래적 사상가의 가능성과 과제를 안고 있다.
 
부안출신은 아니었을지라도 전우선생이 한말에 계화도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신 것도 뜻있는 일이었다. 또한 일찌기 원불교의 대종사이며 창시자인 소태산 박중빈은, 그의 출생지 영광의 길룡리를 떠나서, 젊은날에 부안의 변산에서 그의 영력과 수행을 도야하면서 원불교의 많은 초석을 닦아서, 그가 마침내 익산총부에 새로운 이 땅의 건강한 생활대중불교를 놀랍게 일구어냈다. 충북대 철학과 교수를 지내던 전남 출신의 윤구병이 새로운 동동체 교육을 위하여 부안 변산에 찾아오고 마침내 부안변산공동체를 시도하면서 일구면서 많은 기대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 관심을 모았다. 아직도 정년이 창창히 많이 남은 안정된 교수직을 박차고 그가 변산에 거하고 새로운 교육운동과 공동체운동을 추구한 것은 값진 일이었다. 아쉽게도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값진 운동과 시도가 부안의 지역사회와도 유기적인 관계를 더욱 이루면서 추구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었다. 모든 것을 다할 수는 없는 한계들이 있지만, 그러나 나름대로 부안의 변산공동체는 대안교욱의 한 모델로서 건강한 토대를 나름대로 구축한 것으로 보여지고 또한 이러한 새로운 모델은 허병섭과 김창수들에 의하여 무주에서 추구된 새로운 교육운동인 푸른꿈고등학교나 새로운 공동체 및 나아가 장성의 새로운 인문, 철학고교인 지혜학교 등에 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고 있다. 어쩌면 부안에서 더욱 추구될 인간의 공동체와 대안교육은 아직 그 창조적 도상에 있다고 생각된다.
 
일찌기 허균이 율도국을 꿈꾸며 조선의 신분의 차별이나 귀천이 없는 이상적 평등사회를 추구하던 그 공간이 부안이었음은 결코 우연으로만 받아드릴 수 없는 그 이상의 가치와 터전이 부안이 아닐까 한다. 비록 허균과 같은 혁명적 기상과 사상은 아니고 체제내의 개혁가이긴 했지만, 유형원의 전 삶을 바친 개혁의 꿈도 아울러 부안이 추구할 상징과 가치라고 생각된다. 특히 허균의 부안을 통한 이상향의 이념과 깃발은 저 갑오년의 위대한 동학혁명의 이념과 깃발로 이어지고 지운 김철수의 인간적 사회주의로의 민족해방운동과 평등사회의 추구로 승계되고, 마침내 오늘의 현대적 상황에서 가까이는 부안공동체의 놀라운 승리였던 반핵평화운동에까지 연속선으로 이어진다고 보여진다. 거기에 일찌기 허균의 가장 깊은 정신적 문우이자 시우였던 민중 여류시인 매창으로 부터 근 현대의 우리 문학사와 시문학의 거장 신석정 시인이 이어지며 박영근 시인과 박경리 토지문학의 거장의 위상에 이르른 평론가겸 교수인 최유찬의 지적 탐구와 세계도 필자는 모두 부안정신과 민중사적인 소중한 가치와 자산으로 그렇게 파악한다. 부안의 비극적인 진보세력의 몰락과 그 역사 속의 빨치산의 투쟁과 장기수들의 고난까
지도 우리는 민중사와 통일의 새로운 역사적인 평화와 상생 해원의 차원에서 새롭게 녹여지고 검토되고 추구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제 부안민중사를 아쉽게 마감하면서 그간 무려 일년을 경과하면서 이 장기연재를 가능케 많은 애정과 기대와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우선 맨 처음 필자에게 이렇게 귀한 민중사집필을 권유한 고영조 전 군의원과 부안독립신문사의 우병길 대표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귀한 자료를 아낌없이 제공하고 애정을 기울여주신 이춘섭 부안복지관장님, 부안문화원의 김원철 원장님과 과장, 부안백산고교의 정하영 교장님과 지운선생의 친필도 제공하여 주신 여수의 박찬 선생, 장기수 임방규 선생님과 박찬희 선생, 부안의 귀한 자료를 주신 정재철 선생님, 강금원 원장에 대해 귀한 말씀과 자료를 주신 김종규 장로님, 무엇보다도 부안의 민중사의 지난한 자료난에 생생하게 자신의 삶과 시대적 삶을 진실한 기록으로 남기신 김형주 선생님과 귀한 운동을 책으로 엮으신 엄영애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생생한 80년 이래의 부안민중의 투쟁과 현장적인 증언을 위하여 바쁜 농사일의 시간과 상황 중에도 두세차례 귀한 자리와 토론과 시간을 아끼지 않고 자료와 말씀을 주신 80년대 부안민중운동의 주인공 박배진님과 이벽연님, 필자에게 아낌없이 애정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전부안농민회장 김진원님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다시 한번 부안민중사를 통해서 부안이 생거부안의 산자수명한 삶의 터전일 뿐 아니라, 참으로 허균을 비롯한 수많은 걸출한 사상가와 선각자들이 민중과 함께 새로운 우리 삶의 이상향을 꿈꾸고 추구한 그 놀라운 한국사회의 새로운 삶의 자리가 동학혁명과 지운의 사회주의와 민족해방 혁명의 이상과 실천에 이어서 매창과 신석정 시인의 시정신과 80년대에 타오른 부안민중운동과 이어서 반핵평화의 깃발로 생명생태공동체의 승리를 일군 위대한 실천과 꿈과 공동체의 실현이 우리의 부안을 통해서 닥아올 새만금시대와 통일한국의 모델과 전범이 되고 실천의 위대한 터전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일년에 걸친 부안민중사의 펜을 이만 놓고자 한다. 여러분! 반갑고 진심으로 감사하였습니다. 다시 뵐 날을 기원드리며 부안독립신문의 발전과 함께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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