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밝게 왔다. 만나기 전 전화통화를 몇 번해서인지 낯 설지는 않았다. 자신들은 상서면 청림 출신의 독립유공자 김병선(金炳善)의 후손이라는 말을 이어갔다. 김병선은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지만 이 애국장은 정부기관에서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동안 가족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 보훈처에 있는 김병선의 공훈록을 살펴보자

1920년에 북간도에서 대한독립군 부대의 홍범도 사령관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국내진입작전을 위해서 김병선과 정재균을 함경남도 풍산군에 파견하여 국내 정황을 살피도록 했다. 이곳에서 정탐을 하다가 체포되자 경찰은 이들을 데리고 산중에 은닉한 권총과 폭탄을 찾으러 갔을 때, 김병선과 정재균은 경찰의 총기를 빼앗으려다 일경의 총에 맞아 순국했다. 1921년 1월 24일이다.

더 살펴보면 김병선의 생년월일과 본적은 미상으로 나왔고, 주소는 만주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이들이 체포되었으니 재판을 받았다면 판결문 등으로 본적지나 주소 등이 드러났을 텐데 재판을 받지 않고 순국했기 때문에 이름만 나와서 후손 추적이 불가능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듯이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끼니 갈망도 하기 어려운 고단한 생활을 했기에 배움과 풍족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본의 감시와 불이익 때문에 어쩌든지 선조들의 독립운동 사실을 숨겨서 조상을 기억하거나 증명하기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홍모 부부가 모시고 살았던 외할머니 김명숙 (1886~1986)은 남편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그리고 몸이 쇠한 다음에는 일본순경이 온다며 극도의 공포감을 가지고 살았다. 그렇지만 더 이상의 깊은 얘기에는 침묵했다. 김동순(1919~2017)은 김명숙의 외동딸이다. 김동순도 유명을 달리하기 1주일 전 정신이 혼미해서야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얘기했다. 그러면서 세상이 좋아져 돌아가신 아버지의 뼈라도 찾을 수 있다면 유전자 식별이 가능하다는데 자신을 화장하지 말고 묻으라고 유언했다. 가족들은 사망신고를 하고 제적등본을 떼어보니 외가의 김병선(金炳善), 김명숙(金明淑)이 확인되고 김병선을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독립유공자로 나왔다. 이들은 제적등본과 폐쇄등기부 증명서 등을 근거로 원호처에 유공자 가족 신청을 했지만 반려되었다. 1921년도에 순국한 김병선이 당신의 외할아버지인 청림의 김병선이라는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고 기관에서는 되물었다.
1921년에 풍기에서 경찰에 피살되었으니 거의 100 여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이들은 외할머니의 평소 얘기나 어머니의 증언 등으로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립유공자 김병선이 자신들의 조상인지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봉착해 있다. 외가가 있었다는 상서면 청림을 찾아서 증언채록이라도 해서 이들의 상황을 알아봐야 할 것이다. 김병선이 살았던 청림 집의 폐쇄등기부로 살펴보니, 1927년도에 노적리 고씨에게 팔렸다가 지금은 류씨가 주인으로 나온다. 이곳에 살았던 고씨 후손을 찾아 증언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어떨까.
정보가 부족한 가족들이 조상들의 독립운동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참으로 지난(至難)한 일이다. 정부에서는 전문 연구소 등을 만들어서 유공자를 발굴하고 후손을 찾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이다. 임신한 부인을 뒤로 하고 만주로 떠나 홍범도장군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청림의 김병선, 하지만 북한의 어느 산골에 묻혀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독립운동 하다가 아침의 물안개처럼 이름 없이 쓰러진 이들을 찾고 기억하는 것은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오늘은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된 해방절이고 독립운동을 한 선조들의 이름을 외쳐 부르는 날이다. 그 이름을 잊지 않고 꽃피우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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