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변산농협조합장이 5월 20일까지 면직하겠다는 내용의 각서.

우리의 1970년대는 박정희의 유신독재의 폭압적 시대였다. 그러나 반면에 이 시대는 위대한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투쟁의 시대였으며 한 편으로는 오랫동안 금기시 되었던 민중적 제 권리를 위한 투쟁의 시대였다. 지금은 많이 빛이 바랜 왕년의 영웅과 존재가 되어 슬프게 생각되지만 1970년대 벽두에 ‘오적’과‘황토’의 시인으로 박정희의 서슬 푸른 독재에 맞서 싸우고 수감되어 시대의 어둠을 밝히던 시인 김지하와 더불어 <아침이슬>의 작곡가와 가수 김민기의 ‘상록수’의 노래와 ‘늙은 병사의 노래’들은 화가 오윤의 천재적이며 섬뜩한 민중적 삶을 형상화한 그림들과 더불어 가히 우리 역사에 있어서 찬란한 민중시대를 열어가고 꽃피우던, 가히 고난 속에서 피어난 아름답고 찬란한 행복한 민중적 꿈틀거림이 역동적인 희망으로 살아오던 행복한 시대였다.

우리 부안민중사는 이제 드디어 종반을 향하여 치달리고 있다. 부안민중사의 차원에서도 부안은 일찍이 저 갑오년 1897년의 동학농민혁명의 함성과 일제하의 조선 땅 어느 곳에 못지않게 부안의 백산지역에서 지운 김철수의 항일이념의 영향 속에서 적색농민조합운동으로 꽃피웠던 일제하의 항일농민운동의 치열했던 전통이 살아있던 자랑스러운 땅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1945년의 해방공간에서도 유별하게 강했던 진보 좌파운동의 지역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한국전쟁 이후에 부안은 사실상 분단의 비극과 냉전이념적 상황에서 이 찬란한 민중운동적 역동성과 전통이 차단되고 단절된 안타까운 현장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부안은 다시 자랑스러운 자신의 민중적 정체성과 전통적 역동성을 서서히 찾아가고 눈뜨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사실상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의 벽두에는 전국적으로도 매우 자랑스럽고 성공적인 민중적 승리의 현장으로 일컫지 않을 수 없는 열정과 실천적 삶이 꽃피워지기 시작하였다.

무릇 집단적 삶의 집적인 역사에나 개인적인 삶이나 가릴 것 없이 역사와 사건에 가작 핵심적인 요소는 물론 그  분명한 전제가 되는 바르고 의로운 뜻과 생각을 담은 사상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꽃피우고 이룩하는 것은 소중한 사람이며 인연이지 않을 수 없다. 부안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민중적인 삶을 일깨우고 다시 싹트게 한 민중적 전형이며 농민적 삶의 원형질의 두 사람이 부안민중사 지평에 민중사에 떠올랐다.

두 인물은 전혀 다른 삶의 여건과 족적으로 살아왔으나 부안 땅, 민중의 삶의 자리인 농촌과 황토에서 아름답게 조우했다. 그리고 하나의 삶과 불꽃으로 타올랐다. 그들의 이름이 변산의 끝 모항에서 7대 째 가난한 농민의 자손으로 아름다운 상록수를 꿈꾸며 농촌의 아들로 살아가던 훗날 민중시인으로 성장한 아우 박형진의 형인 젊은 농민 박배진(1947~)과 또 한사람은 서울에서 ‘갯마을’의 작가 오영수의 아들로 성장하여 동국대 농학과 출신으로 부안으로 옮겨와서 지식인 농민으로 살아가던 오건(1948~1992)이었다. 그는 대학에서도 농어촌사회연구모임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부인 이준희도 역시 오건과 같은 대학출신 동문이었다. 그녀도 남편과 함께 카톨릭농촌여성운동의 활동가로 일하였다.
작가 오영수는 빼어난 작가였으나 그가 영남출신으로서 한 때는 ‘전라도 개땅쇄론’을 써서 필화사건으로 전라도 민중들에게 원성을 사던 작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건은 그의 집안의 영남태생 따위의 지방색 따위 같은 것을 완전히 초월해서 부안 땅에 정착하고 참으로 진실한 농민과 민중의 삶을 온전히 살았다. 오건은 형인 천재적 민중화가로 그 명성을 떨치다 요절한 화가 오윤(1946~1986)의 동생이었다.
아마도 오건의 민중적 농민의 삶은 그의 형 오윤으로 부터 음으로 양으로 진실한 농민과 민중적 삶을 그리워하면서 그의 삶의 방향과 중심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오건은 전혀 기름지지도 않은 암반성 토양의 척박한 땅인 산내면 도청리에 자신의 집을 만들고 스스로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오건은 원래 농과대학출신으로서 이 땅에서 가히 비닐하우스도 최초로 도입하여 농사를 지은 농사꾼이었다. 오건이 도청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마을의 젊은 후배겸 청년인 이백련이 이 모습에서 큰 배움과 자극을 얻으면서 이백련도 훌륭한 농촌 및 농민운동가로 평생을 살아오면서 현재 생산자 전국회장의 중책도 감당하고 있다.

박배진은 일찍이 부안 모항의 젊은 농민으로 농촌의 이상적 삶을 꿈꾸며 상록수처럼 그렇게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던 원래는 보수적이고 소박하며 건강하고 모범적인 청년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일찍이 박정희의 통치전략으로 채택된 새마을 운동에도 열심이었고 농촌살리기 운동의 일환이던 4H운동이나 유달영 박사의 농업기술을 위한 노력과 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하던 성실한 젊은 농촌청년이었다. 이렇게 건강하고 소박하고 성실하던 농촌청년 박배진은 그가 열심히 일구던 농사일과 함께 열심히 여러 가지 교육의 기회를 찾아서 공부를 하던 중에 우연찮게 강원룡 목사가 이끌던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중간집단 지도자 교육에 참여하고서 새로운 농민운동과 의식화 운동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이후에 이미 1970년대에 이 땅에 새로운 농민운동을 공동체적으로 일구어가던 카톨릭농민회에 관심을 가지고 실천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1980 부안민중 투쟁의 장이었던 부안성당

일찍이 한국의 카톨릭농민회는 유신독재가 모든 민중적 자유와 권리를 심각하게 억압하던 어둡고 암울한 시대에 농민들의 삶과 권익을 위하여 유명한  이른바 부당한 고구마 수매로 터진 함평고구마사건이나 안동지역에서의 오원춘사건을 통해서도 그 존재가 잘 알려진 농민운동조직이었다. 1976년에 발생한 오원춘 사건은 정의로운 농민의 삶을 심각하게 관이, 특별히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중앙정보부가 일개 농민의 삶을 유린한 폭거였으며 이를 카톨릭농민회와 그 배경으로 같이 싸운 천주교사제단과 안동교구장이던 두봉주교들의 혼연일체의 투쟁으로 농민들에게는 물론이고 일반 사회에 잘 알려진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벌어진 카톨릭농민회의 운동이 호남의 부안지역에서도 변산의 끝 동네 지역인 모항에서도 불이 붙고, 모항의 박재진과 6Km가 떨어진 도청리에서 살아가던 오건의 만남으로 살아있는 부안민중사의 상록수의 새로운 민중적 삶과 투쟁과 역사가 펼쳐진 것이었다.

전회에 소개되었지만 일찍이 노동운동에서의 새로운 상징이 된 전태일 열사는 그가 치열하게 노동자의 권리를 위하여 싸우며 노력하던 중에 늘 애타게 찾았던 것이 “나에게 대학생 친구 하나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던 갈망과 안타까움이었다. 그러나 부안의 농촌의 아들 박대진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거의 동년배의 대학지식인 출신이지만 동지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인연이 된 오건이 곁에 있었다. 그래서 박대진은 왕복으로는 무려 30리에 달하는 모항에서 도청리를 뻔질나게 오가면서 그들의 인간적 정을 두텁게 쌓아가면서 아울러 새로운 부안농민운동의 대소사를 형제처럼 논의하고 의로운 농민적 삶을 위한 싸움에도 서로의 실천적 삶을 결합시켜 성공하고 승리할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너무도 애석한 것은 오건의 집안 가계의 내림 탓으로 인한 너무도 짧게 40대의 이른 나이로 오건이 세상을 뜬 일은 박배진을 위해서나 부안민중사와 전체 민중의 참 운동에서의 안타까운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박배진은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고나서 교육 중에 들은 전북카톨릭농민회에 자기의 발로 스스로 찾아가 회원이 된다. 카농의 교육을 받은 박배진은 더욱 실천적인 농민들의 권리를 위한 싸움과 농민회활동에 분망하게 되고 이결과는 엄혹했던 신군부에 의한 5.18광주학살 무렵에 변산면 농업협동조합장 축출 사건으로 발전한다. 박배진과 오건의 탁월한 협동과 결합 및 농민들과 사회각계의 비상한 지원과 관심 속에서 이들은 광주항쟁의 비극 직전에 역사적인 지역농민들의 주체적이며 역동적인 단합과 싸움에 의한 구 경찰 및 공화당 당료출신의 당시의 현직 농협조합장 변모의 축출에 성공하고야 만다.

원래 농협은 농민들이 마땅히 주인인 협동조합 조직인데도 불구하고 해방 후에 농협은 이른바 농민 위에 언제나 군림하는 거대한 권력적 공룡이었고 또한 부패의 대명사인 전형적인 복마전이었다. 평소 이 농협에 대한 거대한 농민들의 분노가 광주항쟁 발발 직전에 부안지역에서 전형적인 민중적인 사건으로 터진 것이었다.

이 변산단위농협조합장 축출사건의 발단은 1980년 3월 11일 부안군 산내면 도청리 도청부락에서 비료구입차 격포창고에서 농협직원 김석익과 출자문제로 시비가 벌어짐으로 시작되었다. 원래 1980년 1월 31일 변산농협정기총회에서는 비료 구입시에 회원들이 모두 각각 300원씩 출자토록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이 구매결정이 부당한 것으로 판단한 오건은 총대로서 소신을 가지고 반대를 한 것이었다. 이 오건의 반대의견에 완전히 같이 판단하고 공감한 박배진, 이백련, 전순덕, 박영구등 7인들이 함께 나타나서 비료를 구입하려는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무려 3시간을 기다리게 만든 농협직원과 서로 간에 ‘출자를 안하면 비료구입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의 대화와 토론을 하게 된 사태에 이르렀다. 오건은 “농협도지부장과 대화에서도 회원 개별동의서를 받지 않으면 출자를 요구할 수 없다는 말씀이 계셨는데 무슨 소리냐”하면서 서로 간에 큰 말다툼과 소동이 일어나는 속에서 마침내 농협직원이 나서서 이들과 싸움을 하려는 상황에서 결과적으로“이 새끼 네가 뭔데, 너 같은 놈들 하고는 애기하기 싫다”고 하면서 조합장이 “손대지 마라. 저런 것들 때렸다가는 개값 물라.”는 망언을 하게 되어 이 싸움이 감정적으로 대립, 격화되었다.

변산농협장의 '개값 물라' 망언 사건을 소개하는 전단.

이 후에 박배진과 오건 및 회원 9명이 농협전북도지부에 정식으로 질의서를 내고 이들의 언쟁과 싸움 중에 오건이 소형녹음기를 이용하여 녹음한 내용을 바탕으로 농협의 강제출자건과 함께 농협조합장의 고압적이고 잘못된 태도와 언행, 평소에 농협이 마땅히 그 주인인 농민을 위한 기관운영이 아닌 농협을 위한 농협에 대한 총괄적인 문제 제기와 근본적인 시정을 위한 투쟁이었고 이것의 본보기로서 변산단위농협조합장의 축축을 요청한 것이었다. 늘 농협의 조합장들이 그렇듯이 지방의 토호들 출신이거나 힘께나 쓰는 사람들이 행세하듯이 조합장이 되는 것이었고 변산조합장의 경우에도 경찰과 공화당 관리장 출신의 이력을 지닌 일명 ‘변산면 짝대기, 변똑똑‘으로 불리워지던 그가 민중과 농민위에 군림하던 행태와 언행으로 민중들에게 위화감을 주던 상황에서 이른바 “개값물라...”의 파동이 크게 확대되고 내연화된 것이었다.

급기야 다급해진 변산농협조합장의 상부에의 허위보고와 주인인 농협회원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한 변산농협조합장의 축출을 강력히 요청하는 속에 4월 2일에 박배진외 58명의 서명날인 속에 카톨릭농민회 전북지구연합회결의문이 발표되고 이에 연대투쟁을 하는 변산농협민주화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고 1980년 5월 6일에 천주교부안성당에서 120여명의 농민들이 모여서 궐기대회가 열렸다. 그리고 이 궐기대회에서 농민들은 “유신잔재세력 물러가라! 농협임시조치법 폐지하라! 변산농협장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행동으로 이를 관철하고 노력할 것을 결의했다. 이와같이 사회적 파장이 커가는 속에서 급기야 중앙언론인 동아일보 1980년 5월 12일 사설에서도 “농협사업과 농민불만”이라는 제호 속에서 농협운영에 있어서의 농협의 주인인 농민의 뜻에 반하는 출자의 강요나 조별판매 강요, 영농자금 댇출에 있어서의 예금이나 공제가입의 강요, 특정 농약의 강매의 금지를 지시한 농협중앙회의 대책까지를 포함한 농협운영의 독단적 행태와 강압적 자세등을 바꿀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 싸움은 마침내 1980년 5월 6일에 작성된 변산농협조합장 변모씨의 5월 20일까지의 면직처분 각서의 작성으로 민중적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들 박배진과 오건은 조합장 축출에 성공하고 나서도 광주에서 들려오는 항쟁의 소식에 두려움 없이 광주로 같이 싸우기 위하여 떠나려고 노력하다가 전주카톨릭당국과 농민회 지도사제의 만류로 중단되기도 했다. 또한 전북경찰청에서 5.18 광주사태 이후에 이른바 삼청교육대에 박배진을 찍어서 보내려고 하였으나 본인 스스로의 완강한 항거와 카톨릭전주교구청의 지원에 의해서 저들의 기도는 달성되지 못하였다. 훗날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박배진은  당시의 상황에서 민중적 싸움과 대의 속에서 축출되었던 변모 전조합장에 대해서 인간적으로는 연민스러워하는 소회를 토로하고, 그가 고향을 떠나서 채무로 어려워진 삶의 여건을 박배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선처하려고 노력하였음을 조용히 술회하기도 했다.

신부, 시인, 종교사회학 박사.
전북 출생. 중앙대 정경대 졸, 한국신학대 수학. 서강대 대학원 졸. 독일 보쿰(Bocum)대 신학박사과정 수료(종교철학, 신학적 인간학 전공). 성공회대 사회학박사(종교 사회학. 사회철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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